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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a Stella

[프리로렌]Nicht Mehr Verzweifeln 본문

1차/단편

[프리로렌]Nicht Mehr Verzweifeln

시나모리 2019. 9. 27. 15:20

절망한 이후의 나는 또 절망했던가. 이제는 그런 것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는 게 절망이라면 지금의 나는 역시 절망한 게 맞는 걸까. 아니, 희망과 절망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그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존재였다. 안에 든 것 따위 하나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게 전부인 텅 비어버린 무언가.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이런 질문도 이제는 아무 의미를 갖지 않았다. 말이라는 형태를 구성하고 있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질문이었다. 껍데기만 남은 자신처럼 저 말 역시 껍데기만 남아 그저 자신과 함께할 뿐이었다. 의미를 갖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답 따위 존재할 리가 없었고 자신 역시 그 답을 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함께 끊임없는 시간의 흐름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남은 말에 불과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고, 애초에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시간 속에 홀로 묻혀 있었다.


*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하늘이었다. 해도, 달도, 별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새까만 하늘. 빛을 내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시야가 어둡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 두통이 채 가시지 않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로렌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황량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황량한 황야였다.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고통 탓인지 정신없이 일렁이는 기억을 천천히 더듬던 로렌츠는 겨우 자신이 마지막에 들은 말을 기억해냈다.

너 같은 건, 그냥 절망해버려!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다. 아니, 저주가 맞을지도 모른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뱉은 낯선 말의 잔향을 느끼며 로렌츠는 쓰게 웃었다. 그럼 나는 절망한 걸까?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을 무렵, 어디선가 빛 한 점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 있는 건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안이나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 같은…….

그 빛의 정체는 누군가 들고 있었던 등불이었다. 온통 검은색의 향연인 그 사람은 얼굴의 절반 이상이 마찬가지로 검은 베일에 덮여 있어 쉽사리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이내 누군가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로렌츠는 베일 밑에 감춰져 있었던 선명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그는 로렌츠가 자신을 알아봤는지 못 알아봤는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프리, 드리히……?”

“자, 갈 시간이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프리드리히는 로렌츠에게 다가왔을 때처럼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어쩐지 그를 따라가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로렌츠 역시 프리드리히를 따라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걸었다. 프리드리히가 들고 있는 등불은 이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불빛이었지만 그 불빛이 무언가를 비추는 일은 없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규칙적인 박자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프리드리히가 먼저 입을 열 만도 하건만 그는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적막 속에서 걷고만 있던 로렌츠는 결국 먼저 그가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여긴 어딘가요?”

“삶과 죽음의 경계.”

“그럼 저는…….”

“절망하기 직전.”

로렌츠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대답이었다. 더 이상 쳐낼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머리 속에 끼어있던 구름이 걷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세이렌과…….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로렌츠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나는……. 로렌츠가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려고 한 찰나에 우뚝 멈춰 선 프리드리히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잠깐만요. 그게 무슨,”

꼭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그 말에 로렌츠는 고개를 들어 프리드리히를 바라보았지만 제법 거리가 있는 데다 베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좀처럼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발을 내딛은 로렌츠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기우뚱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몸에 와닿은 것은 딱딱한 아픔이 아니었다. 몸에 와닿는 서늘한 부드러움에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로렌츠는 뒤늦게 자신이 프리드리히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로렌츠와 달리 놀란 기색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프리드리히는 마치 달래주려는 것처럼 로렌츠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최선을 다 했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그러니 이제 쉬어도 괜찮아. 그 누구도 너를 원망하지 않아.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정, 말인가요…….”

상냥한 목소리가 자아낸 그 말에 어쩐지 나른함이 몰려와 로렌츠는 겨우 말을 끝맺고 눈을 감아버렸다.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린 아이를 재우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점점 따스해져가는 것을 느끼며 로렌츠는 그대로 그 온화함에 몸을 맡겼다. 가물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떠오른 것은 결코 원망이 아니었다.


* * *


황야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프리드리히는 본능적으로 이제 자신이 사라짐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었던 그 이유는 바로……. 존재의의가 사라졌으니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존재는 사라지는 게 마땅했다. 프리드리히는 그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겸허히 이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괜찮아. 더 이상의 절망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고결한 존재는 그렇게 소멸을 받아들였다.


♪...Guten Abend, gut' Nacht

Von Englein bewacht

Die zeigen im Traum

Dir Christkindleins Baum

Schlaf nun selig und süß

Schau im Traum 's Paradies

Schlaf nun selig und süß

Schau im Traum 's Para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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