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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거짓 사랑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A5, 60p, 6000원
스바이즈♀/드라마 상대역으로 만난 스바루와 이즈미 이야기. ※드라마 촬영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이 본문에 제법 많이 등장합니다.
“미역 선배가 왜 여깄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마주치자마자 무례한 말을 내뱉은 스바루에게 이즈미 역시 사나운 말투로 그 말을 되돌려주며 손에 쥔 대본을
꼭 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받아들이는 건데. 죄없는
대본을 괜히 원망하며 이즈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곧 방영될 예정의 주말 드라마의 대본은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로 여러 번 읽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모서리가 약간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이번에 이즈미가 맡은 역할은 드라마의 주연은 아니지만 제법 비중 있는 조연으로,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어딘가 덜렁거리는 면이 있는 새내기 여대생 역할이었다. 자신의
이미지와는 꽤나 거리가 있는 역할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역할을 받아들인 것은 평소의 자신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을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물론 시청률이 어느 정도 보장된
시간대에 편성된 드라마라는 점도 영향을 아예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드라마가 대개 그렇듯이
러브라인이 있을 예정이었고 대본대로라면 아마 이즈미의 상대역은 냉철하고 어딘가 까칠한 면이 있지만 유독 이즈미가 맡은 배역에게는 친절하게 구는
선배일 터였다. 아직 사전 미팅 이전이고, 이즈미가 캐스팅
됐을 당시에는 상대역은 아직 캐스팅되지 않았기에 상대역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같이 찍어도 쟤랑 같이 찍을 게 뭐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도 잠시, 자신의 상대역의 이미지를 떠올린 이즈미는 스바루와는 엮여도 같은 대학생 동기 정도일 거라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
“……그럼 소개 계속할게요. 아마노 시즈카 역의 세나 이즈미 씨. 그리고 카나자와 세이지 역의 아케호시 스바루 씨. 저희 드라마의
비주얼과 또 하나의 러브라인 담당이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세나 이즈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케호시 스바루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어째서 내 상대역이 얘인 건데!?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이즈미는
사람 속도 모르게 밝게 인사하는 스바루를 보고 속으로 눈을 흘겼다. 거기다 이미지 완전 반대라고? 얘가 그런 역 소화할 수 있을……. 여기까지 생각하던 이즈미는 자신이
맡은 역도 원래 자신의 이미지와는 꽤나 괴리감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입술만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덧
소개가 다 끝나고 오늘은 한동안 호흡을 맞출 사이니까 서로 알아가자는 주연 배우의 말에 이즈미는 다시 얼굴에 사무적인 미소를 띄웠다.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 부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아니지, 시즈카가 고의로 세이지 어깨에 기댄 건 아니지만 세이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즈카한테는 잘해주잖아. 어깨에 손 정도는 올릴 수는 있지.”
“아무리 둘이 썸 타는 사이라곤 해도 서로 자각도 안 했잖아. 서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작게 미소 지어주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끌어안는 것도 아니고 어깨에 손 살짝 올리는 것 정도는 굳이 안 사귀어도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난 이게 세이지가 시즈카를 내심 좋아한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선배는 세이지 역도 아니잖아. 스바루의 맺음말에 이즈미는 결국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연기를 맞춰보다가 티격태격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촬영장에 있던 대부분은 딱히 두 사람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싸움 자체는 잦은 편이었지만 대개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고, 딱히
큰 싸움으로 번지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싸움의 70%는
이즈미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늘은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간만의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스바루는 이제 우리가 찍을 차례라며 얼른 가자고 이즈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스바루의 손을 탁 쳐낸 이즈미는─이것도 그가 진 날에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방금 전까지의 까칠해보이는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수줍은 소녀의 얼굴을 한 그는 마찬가지로 옆에 선 스바루를 바라봤다. 깜깜한 길거리를 함께 걸어가는
것은 세나 이즈미와 아케호시 스바루가 아닌, 아마노 시즈카와 카나자와 세이지였다. 계속된 실수로 밤늦게 귀가하게 된 시즈카를 우연히 발견하고 바래다주는 세이지가 나누는 대화는 아까의 열띤 말다툼이
무색할 정도로 풋풋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신간) What happen to me? A5, 28p, 3000원, 성인only
마코이즈♀/미래 날조. 섹파 관계인 마코토와 이즈미 이야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흐릿하게 보이는 이즈미 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한숨을 내뱉었다. 손으로
협탁을 더듬어 안경을 찾은 후에 시계를 쳐다보니 시곗바늘은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시간은
일찍 깬 거였구나. 그럼 그렇지, 평소라면 벌써 비어 있을
옆자리가 아직도 차있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일찍 깼기 때문이었다. 한결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이즈미 씨의 얼굴은 어젯밤의 일이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닌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우 군?”
“깨, 깼어요?”
이크, 언제 깬 거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잠에서 깼는지 어느새 이즈미 씨는 하늘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둘러대야
하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어색하게 웃자 이즈미 씨는 요령 있게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내 옷 좀 주워줄래?’라며 침대 한켠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고
있던 옷더미를 가리켰다. 차마 이즈미 씨의 옷만 골라낼 자신이 없어 옷더미를 통째로 건네주고 등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즈미 씨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화장실 좀 빌릴게. 아침은 뭐 먹고 싶어?”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해먹을 테니까…….”
“거절 안 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마침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내 대답에 이즈미 씨는 더 이상 권유하는 대신 ‘그래?’라고만
대답하고선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지 않아 내가 꾸물거리며 옷을 막 주워입었을
때, 간단한 세안만 마친 듯 이즈미 씨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갈게.”
“이즈미 씨, 아침은…….”
“집 가서 먹을게. 설거지 할 거 늘면 귀찮잖아.”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관 근처에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든 이즈미 씨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삐리릭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끝나자 집 안에 남은 것은 그저 고요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집 안에는 이즈미 씨의 흔적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스케줄도
없는데 그냥 한숨 더 잘까. 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안경을 다시 침대 옆의 협탁에 벗어두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잠에서 막 깼을
때의 한탄이 다시 흘러나왔지만 이번에는 들어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신간) 꿈 속의 인연 A5, 64p, 6000원, 성인only
레오이즈♀/대학 AU. 서로 모르던 사이였던 레오와 이즈미가 꿈에서 만나는 이야기.
츠키나가 레오는, 요즘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있다.
───라고 말해도 잠에서 깨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딱히 없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도 같은 꿈을 꿨다’라는 확신만은 정신이 맑아져도 강하게 남는
탓이었다. 물론 꿈이 기억난다는 것은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는 것과 매한가지니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여지라곤 일절도 없었지만, 어째서 그런 확신은 매일 꼬박꼬박 드는지 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쫓기듯이 깨는 것도 아니고, 잠에서
깬 이후에 식은땀에 젖어 있는 것도 아니니 적어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아, 정말 신경 쓰이게! 차라리 꿈을 꿨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일도 아닐 텐데. 다른 것보다는 꿈에서 태어났을 무수한 영감 중 하나조차 건져낼
수가 없다는 게 제일 레오의 속을 긁는 일이었다. 의식마저 뛰어남은 영감이라니, 얼마나 멋진 일인지! 오늘도 이렇게 명곡 하나가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못해 속이 쓰렸다. 두고 봐, 오늘은
반드시 기억해내고 말 테니까! 어제와 다름없이 같은 꿈을 꿨다는 확신만을 가지고 잠에서 깬 레오는 가르르
소리를 내며 그렇게 다짐했다.
* * *
핫, 소리를 내며 눈을 뜬 레오는 아직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이전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기억나는 부분이 몇몇 있다는 것─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있었다는 것, 거기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 사람과 무엇을 했는지는 물론 그 사람의 생김새조차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레오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밀려오는
아쉬움을 씹어삼킨 레오는 몸에 남은 아련한 감각이 날아가기 전에 머리 한구석에 깊숙히 박아넣었다. 대체
누구길래 계속 내 꿈에 나타나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웬만한 건 잘 잊어버리는 자신이니 그가 무슨 말을 했다 해도 자신이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예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는 누군지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제는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 그의 옷자락을 붙잡듯이 레오는 손을 내밀어 허공을
꽉 붙들었다.
* * *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그리고 역시 새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 구분조차도 잘 가지 않는 하얀 옷 탓에 그 역시도 금방 이 공간 속에 녹아 사라져버릴 것 같아 레오는 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런 레오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가 이미 여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져버림과 동시에 레오는 꿈에서 깨어났다.
“……아.”
그는 사라지기 직전에 미소짓고 있었나? 아니면? 바람에
실려 흩날리듯 사라진 그의 모습은 매우 색소가 옅었던 것 같았다. 마치 환각처럼 눈동자에 새겨진 그의
마지막 모습에 레오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신간) 月光花 B6, 64p, 6000원
레오이즈♀/시대물 AU. 황제 레오와 기생 이즈미 이야기.
잠행을 나온 레오는 제법 뿌듯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비해 확실히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레오는 냉혹한 황제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궁에 한정되는 얘기지,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황제였다. 아마 황자 시절 때부터 이렇게 실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봐온 덕일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생생한 모습에 어쩐지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아 레오는 휘파람을 휘휘 불었다. 그렇게
여유롭고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레오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눈을 돌렸다.
“호오……?”
사람들이 웅성대는 원인이자 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어느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그는 옷에 절대 뒤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게 하고 있었다. 저 정도의 미모는 궁에서도 보지 못했는데. 반쯤 홀린 듯이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레오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에야 제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더 그의 자취를 붙잡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레오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서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사내 둘에게 다가가 냉큼 말을 걸었다.
“혹시 방금 이곳을 지나간 여인이 누군지 아는가?”
이크, 말투.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들의 모습에 레오는 지금 자신의 꾀죄죄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말투
탓이라고 제멋대로 짐작하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다행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던 듯 그들은 어이없다고까지
느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자네, 세나를 모른단 말이야?”
“요 근처에서 못 보던 얼굴인 걸 보니 타지인인감? 이 근방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생이라우.”
“생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거기다 시 짓기에 그림까지 못하는 게 없다지 아마?”
“그래서 그런지 손님도 엄청 가려받는다는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만금을 줘도 못 만난더만.”
그에 대한 정보를 술술 늘어놓는 사내들에게 어디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지까지 알아낸 레오는 고개를 까딱여 사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잠시 이후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레오는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의 얼굴에 행여나 잊어버릴새라 성큼성큼 발걸음을 그가 있다는 기방으로 옮겼다.
*
“세나님, 세나님! 아까
전부터 누가 계속 세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떡할까요? 꼴이 꾀죄죄한 게 제 주제도 잘 모르는
한량 같은데, 역시 돌려보내는 게 맞겠지요?”
“들라 하거라. 기백 하나만은 남다른 것 같으니 잠시 여흥을 즐기는
것쯤은 나쁘지 않겠구나.”
의외의 대답에 시종은 당황해하면서도 머리를 조아리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 시종이 데려온 남자를 들인 세나는 늘상 그랬듯이 그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슨 연유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허, 아까도 이리 느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마치 하늘에
떠있는 달이 이 땅으로 내려온 듯 하구나. 정녕 이 세상 사람이 맞는가?”
밤하늘에 빛나는 달로 실을 잣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카락에 한여름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하늘색 눈동자,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요염한 눈매에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어울렸다. 갓 내린 첫눈의 느낌을 품고 있는 피부 사이로 소담하게 피어난 장밋빛 입술까지 헐뜯을 곳 하나 없이 조화로움
그 자체였다. 낮고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마저 트집을 잡을 데가 없었고 몸에 걸친 옷과 장신구는 서로를
드높이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감탄사만을 늘어놓으며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오를 보며 세나는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그대의 기백이 마음에 들어서 부름에 응한 것인데 아까의 기백은 도통 어디로 간 것이지요? 아니면 아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을 데려온 것입니까?”
“세나, 라고 했던가. 내
사람이 되어달라고 하면 거절할 텐가?”
“꽃은 무릇 섣불리 손대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 그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법이지요.”
당돌한 거절의 말에 레오는 ‘와하핫, 그렇지, 그렇지
말고! 좋아, 맘에 들어!’라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레오를 들일 때부터 유유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세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레오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참을 즐거운 웃음을 터뜨린 레오는 너무 웃은 탓에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세나에게 종이와 붓을 요구했다. 별 말 없이 종이와 붓을 내주고 조용히 벼루에 먹을
가는 세나의 모습이 새로운 영감을 자아내는 것 같아 레오는 일필휘지로 종이에 악보를 그려가며 또 다른 곡조를 흥얼거렸다.
“그대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이런 것쯤이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내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네.”
“대신 다음부터는 어떤 차림으로 오시든 문전박대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이에게 일러두지요.”
“아하하, 영광인데! 그
말은 곡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가?”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만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말만 하도록 하지요.”
세나의 대꾸에 흡족하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레오는
더 이상 질문하지 말고 그에게 악기 연주를 졸랐다. 순순히 이를 승낙한 세나는 악보를 좀 더 자세히
몇 번 살펴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악기의 현을 뜯기 시작했다.
*
레오가 세나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달마저도 기울어진
시각이었다. 그동안 그 어떤 사람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까닭은 세나가 들어올 자리를 온전히 비워두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흠, 어쩐다?”
새벽의 찬 바람을 맞으며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 시릴 정도로 푸른 달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저도 세나 같이 느껴져
레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홀려도 단단하게 홀린 것 같은데. 하긴
홀린 게 아니라면 첫만남 때부터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겠지. 자신은 분명 그때도 지금도 다름없이 츠키나가
레오일 터인데, 방금까지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레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구간) 불꽃이 사랑한 밤 A5, 40p, 4000원
레오이즈/Sound Horizon(성전의 이베리아/연인을 쏘아 떨어뜨린 날) 크오 ※원작을 몰라도 읽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4p의 삽화 포함
“이건 뭐지……?”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보며 이즈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꼭 돌로 만든 누에고치 같이 생긴 그것에, 이즈미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우왓!?”
이즈미의 손이 고치에 닿자, 고치는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이즈미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뱉는 것도 잠시, 누에고치 속에 잠들어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눈을 뜨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 구?”
세나 이즈미. 그쪽은? 이즈미는 자신의 이름을 얘기해주고 되물었다. ……나가,
레, 오.그의 대답은 드문드문 노이즈가 섞인 것처럼 애매했다. 레오라고 부르면
돼? 이즈미의 말에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오 군?”
“응, 세나가 그렇게 부른다면.”
이즈미의 부름에 레오는 확연히
선명해진 목소리로 답하며 몸을 일으켜 고치 속에서 빠져나왔다. 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덕분에 이즈미는
레오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석양을 그대로 담아낸 주홍빛 머리칼, 페리도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머리 위에 삐죽 솟아나 있는
두 개의 뿔과 얼굴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 아, 얘 사람
아니구나. 물론 그럴 것 같았지만. 이즈미의 시선이 자신의
뿔에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자 레오는 재밌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즈미에게 물었다.
“안 놀라네? 나 인간 아닌데.”
“그럴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그래서 레오 군 정체가 뭔데?”
“악마. 불꽃의 악마.”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욕심내지
말걸. 깜깜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이즈미는 짜증난다는 말을 연발했다. 막
돌아가려 할 때에 1년 중 단 하루만 핀다고 해도 좋을 귀한 약초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몇 발자국 간격으로 자라 있는 그것들을 따라가 어느 정도 다 땄을 땐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숲 한가운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갖고 올걸. 짐을
더 늘리기도 싫고, 이 근처는 자주 와봤으니 굳이 지도나 그런 걸 안 챙겨도 괜찮겠지 하는 자만이 불러온
결과였다.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자신이 들어온 길이라 짐작되는 길을 따라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누군가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지금 그쪽으로 가면 위험해. 마물한테 잡아먹힐 거라고~?”
“ㅁ, 뭐?”
이즈미를 자신의 뒤쪽으로 잡아당긴
목소리의 주인은 활을 제대로 고쳐 잡은 후 이즈미가 방금까지 향하고 있었던 방향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휙
하고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얼마 안 가 무언가에 박히는 소리, 그리고 그 무언가가 괴로운 듯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들에 이즈미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활을 쏜 이를 쳐다보자, 그는 ‘내 말 맞지?’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한 이즈미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쪽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네요.”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는데.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무안한 듯 손사래질을 하는 남자에게
이번엔 작별 인사를 한 이즈미는 거짓말처럼 눈에 익은 길을 발견하고 작게 혀를 찼다. 뭐야, 여기 바로 마을 근처였잖아? 이것도 함정의 일부인가. 다음부턴 반드시 뭐라도 들고 다녀야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즈미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 아까 그 남자가 급하게 이즈미를 붙잡았다.
“저기, 혹시 이 근처에 마을이라든가 그런 거 있어?”
“……이 근처에 내가 사는 데
있긴 하지만?”
“그럼 거기까지만 데려다 주라! 응?”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이즈미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자신이 남자를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제법 중대한
문제였는지 남자는 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인 이후로 확연히 밝아진 표정을 지으며 콧노래까지 부르며 이즈미를 따라왔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 난 츠키나가 레오! 그쪽은?”
“세나 이즈미.”
“세나는 이름도 예쁘네! 뭣 때매 여기 있었던 거야?”
“약초 캐러. 그러는 그쪽은?”
“에에-, 이름 알려줬잖아! 편하게 불러도 괜찮다고?”
“……그러는 레오 군은?”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마물 사냥하러! 아까 그놈에만 너무 신경을 써서 세나 아니었으면 노숙할 뻔했다니까? 세나랑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