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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a Stella

[🍋👓]환영을 따라서 본문

2차/단편

[🍋👓]환영을 따라서

시나모리 2023. 7. 1. 01:04

*극단 드라마티카 ACT Phantom and Invisible Resonance에 나오는 쿄고쿠 텟타×카사마이 아유무 연성입니다. 오늘도 CP명을 뭐라 써야 할지 좋아서 이모지로...
*원본 앙스타 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ACT2 중대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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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
1. 명사 유령, 혼령
2. 명사 환영, 환상

0.
딸칵,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한 번 깜빡인 전등은 그보다 조금 늦게 불이 들어왔다. 맞이할 사람이 없으니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생활감은커녕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풍경이었다. 물론 집에서 하는 거라곤 씻고 잠을 자는 것 정도였고, 그것마저도 밖에서 때울 때가 많으니 괜히 누구를 원망할 구실조차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겉옷을 벗어두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불빛이 완전히 닿지 않는 안쪽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지? 올 사람이 있나? 하지만 그런 연락은 못 받았는데? 그럼 강도? 그렇지만 누군가 침입한 흔적 같은 것도 없었는데? 아니, 애초에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형사라는 직업상 쿄고쿠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이라고 결론을 내린 쿄고쿠는 발소리를 죽이며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딱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그림자 역시 쿄고쿠가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걸 눈치챘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발소리 대신 들려온 것은───

“늦으셨네요. 아니, 애초에 집에 잘 안 들어오시는 편이긴 했지만.”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네이비색의 스트라이프 정장, 엉킨 데라곤 한군데도 없이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맑고 푸른 바다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파란 눈동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너…….”

잘 지냈다면 그건 그거대로 짜증날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며 아유무는 한 번 싱긋 웃었다.

 

* * *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아유무의 마지막 모습. 어디에서 들려왔는지도 알 수 없던 총성과, 한순간 시야 자체가 붉게 물들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허공에 흩날리는 선연한 붉은색 액체, 피 냄새도 났던가. 이건 거기 있던 모두가 이미 피투성이였으니 정확하지는 않을지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까? 왜 그러지 못했더라? 아, 그때 기가 만류했었지. 그러고보니 유령은 대체로 삶의 마지막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아유무는─헛것을 본 것이라 치부하기엔, 몇 번이나 눈을 비벼도 아유무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깔끔한, 평소의 아유무의 모습이었다. 그래, 마치 그런 일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쿄고쿠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아유무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왜 그렇게 보세요?’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딘가 어색했다.

“너, 죽었던 게……?”
“아, 그랬었죠.”

그런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좀 치사하지 않아요?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말과는 다르게 아유무의 표정은 꽤나 선선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몇 번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거리던 아유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일단은 형사님이 만들어낸 환영 비슷한 거니까요. 이유는 형사님이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어쨌든, 그런 의미로 한동안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아유무는 잡을 수 없는 손을 내밀었다. 쿄고쿠는 그 손을 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유무의 말대로, 이유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1.
실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테러리스트, 『팬텀』.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물며 이름과 나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신상정보도. 그러나 그는 확실히 존재한다. 물론 실존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제법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보가 충분히 모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 쿄고쿠 측이 팬텀에 대해서 아는 사실은, 2년 전의 놀이공원 테러 사건의 배후라는 것,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마피아─와비루 데니스 켄지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 카사마이 아유무는 팬텀이 경찰 측에 심은 스파이였다는 것, 그리고 입막음하기 위해 팬텀에 대한 정보를 말하려던 아유무를 살해한 것, 정도.

……아, 그랬지. 아유무는 스파이였지. 목적은 경찰 측의 뒷사정을 캐내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경찰이 입수한 팬텀 관련 정보를 은폐하는 것? 전자는 명확하고, 후자는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유무가 없는 지금, 이전에 비해 팬텀 추적이 용이해진 것으로 봤을 때, 그것을 억측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읽던 서류를 괜히 정리하며 쿄고쿠는 몰려오는 씁쓸함을 삼켰다. 제법 믿었는데도. 아니, 너무 믿었던 게 잘못이었을까?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한 번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저도 모르게 한숨이라도 쉬었는지, 맞은편에서 ‘웬 한숨이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한숨의 원인이었다.

“……아유무.”
“아, 또 왜 배신했냐느니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걸까요? 하지만-”

그건 저를 주시하지 않았던 형사님 잘못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아유무는, 아니 아유무의 환영은 쿄고쿠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는 이제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환영은, 본디 그런 것이었으므로.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환영이 나타나는 것 정도에는 하나하나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아유무의 환영은 시도때도 없이, 환영 자신이 내킬 때 나타났다가 마찬가지로 내킬 때 사라지곤 했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환영은 쿄고쿠가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잠시 긴장을 늦추면 귀신같이─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나타나곤 했다. 정확한 원리는 아직 모른다.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답은 부러 하지 않았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으나 긍정하고 싶지도 않은 게 이유였다.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대답하지 않은 게 불만스러운지 뭐라뭐라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그 소리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어느덧 소리가 멀어질 무렵, 건조하게 쓰여진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문장과 다름없이 점조차도 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쿄고쿠가 급하게 고개를 들자, 멀어지던 목소리가 무색하게 아유무의 모습이 계속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좀 저한테 신경 써줄 생각이 드신 건가요? 아니면-”
“아유무, 정말…… 아는 게 없어?”

쿄고쿠의 질문에 아유무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만을 지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예상한 바였다. 자신의 질문에 아유무가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쿄고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어본 것은 무슨 변덕이었을까. 그만큼 간절하게 팬텀을 잡고 싶어서? 그럼 왜 이렇게까지 팬텀을 잡고 싶은 거지? 그 이유는……. 쿄고쿠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되새긴 후에야 아유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형사님이 모르는 걸 알려드릴 수 없어요. 저는 환영이잖아요.”
“…….”

덤덤하게 되돌아온 말에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렇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유무는 팬텀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아유무가 아니었지. 답을 듣기 전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고,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답답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쿄고쿠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며 아유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긋 웃었다.

“제법 절박하신가봐요. 저한테까지 여쭤보시고.”

역시 저를 조금이나마 좋아하셨어서 그런 걸까요? 저는 정말 형사님을 좋아했는데─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들뜬 어조로 신나게 얘기하던 아유무는 갑자기 표정을 확 구겼다. 일그러진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찬가지로 아까까지의 들뜬 목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왜 죽였어요?”
“아유무, 나는,”

무언가의 변명을 시도할 겨를조차 주지 않고 환영은 급변했다.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유무의 머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유무를 죽인 것은 팬텀이다. 적어도 그 수하일 것이다. 아니다. 아유무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면 아유무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아유무를 죽인 건 나다.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에는 이미 아유무의 환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2.
인간관계란 절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것은 물론, 이 바닥에서는 어제까지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오늘 갑자기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쿄고쿠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3인 체제였다가 4인 체제, 그리고 다시 3인 체제. ……아, 지금은 또 4인 체제라고 하는 게 맞을까. 4명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드물게 쿄고쿠가 가장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한 날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시카가 자신보다 늦다니 드문 일이었다. 괜히 시간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액정 한가운데 뜬 숫자는 약속시간 10분 전을 표시하고 있었다. 잠시 어디 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쿄고쿠는 그냥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한 번 주변을 둘러보던 쿄고쿠는 갑자기 인기척을 느꼈다. 아, 맞다. 인기척이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아유무가 서있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갑자기 생긴 여유 탓일 것이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 기다리세요? 루시카? 아니면 시즈쿠?”
“둘 다. 토마면 몰라도 루시카가 나보다 늦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니냐? 별 일도 다 있지.”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 저기 온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아유무는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아유무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금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유무는 쿄고쿠도 루시카를 발견한 걸 눈치챘는지 작게 웃고선 뭐라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형사님이 저를 본다는 걸 알면 루시카는 제법 곤란해하려나요? 곤란해하겠죠?”

그런 의미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쿄고쿠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아유무는 나타났을 때랑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정말, 제맘대로인 환영이었다.

 

*

 

그날은 미묘하게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코앞에서 버스를 놓치지를 않나, 신호란 신호에는 다 걸리지 않나, 정류장을 헷갈리지 않나. 평소에 원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습관이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각이었을 것이다. 괜히 한숨을 쉬머 약속 장소로 걸어가던 루시카의 눈에 먼저 도착한 쿄고쿠의 모습이 보였다. 직업에 맞지 않게 화려한 차림을 고집하는 그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리가 먼 탓에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누구랑 통화라도 하고 있는지 입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정체는 바로 시선의 방향이었다. 어딘가 먼곳이나 바닥을 쳐다보는 게 아닌, 명백하게 다른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 처리. 그러나 쿄고쿠의 근처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정도 높이는 분명……. 직업상 루시카는 감이 예민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는 건, 언제나 이미 그것을 알아버린 이후였다.

“쿄고쿠 씨, 저 왔어요.”
“요, 루시카. 웬 일이야, 나보다 늦고.”
“오늘 일진이 안 좋아서요. 그것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 하고 싶은 말?”

좀처럼 갈피를 못 잡겠는지 쿄고쿠는 눈을 크게 떴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쿄고쿠는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르고 있을 테니.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운을 띄운 데 비해 그 말을 끄집어내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나 의미없는 소리를 입밖으로 내던 루시카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그날 일은 저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니까, 아니,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 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란 말이에요. 알겠죠?”
“뭐야, 너도 신경쓰고 있었냐?”

루시카의 말에 피식 웃은 쿄고쿠는 뒤늦게 ‘……그래도 고맙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보다 감이 몇 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분명 아까 그 말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파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캐묻지 않는 것은 이 사람이 선량한 사람인 탓이다. 따지고 보면,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이었다. 내가 팬텀에 대한 단서를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는 살아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늦어도 한참은 늦은 생각이었다.

“뭐야, 너희. 다 죽어가는 표정이긴.”
“아, 미안.”

토마의 목소리에 루시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상념에 빠진 탓에 그가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녀석만큼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3.
냉동실에 너무 오래 넣어둔 탓일까, 안에 여전히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가라아게에서는 인스턴트 특유의 짭쪼름한 맛이 났다. 식탁에 어지러이 놓여진 자료에서 잠시 눈을 돌려 쳐다본 레몬은 접시가 반쯤 비워질 때까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럴 거면 아예 꺼내지 말 걸 그랬나. 어쩐지 평소보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레몬은 여전히 제 모습을 유지해서 어색한지, 아니면 그 존재 자체가 어색한지는 알 수 없었다.

레몬 안 뿌리세요? 웬 일이람.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전이라면 단순히 잘못 들었을 거라 치부했을 목소리의 주인이 당연히 그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환영의 존재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따지고 보면 환영의 목소리이니 환청과 다를 게 없었을 텐데도.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나타난 환영은 사라지는 것도 제멋대로였다. 평소에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곤 했는데. ……잠깐, 그런데 언제부터 아유무가 안 보이기 시작한 거지? 상처가 생겼음을 눈치챈 순간부터 상처 부위가 아파오는 것처럼 위화감을 깨달은 순간부터 의문이 끝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사라진 거지? 아니, 애초에 왜 나타난 거지? 그러나 그 어느 의문에도 답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갑자기 나타난 환영이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무릇 답이 없는 질문도 존재하기 마련이니.

그래, 환영이었으니까. 아유무도 잊을 만하면 본인이 환영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으니까. 해결되지 않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쿄고쿠가 자료에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이 찝찝한 기분은 단순히 환영의 부재가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환영, 환영이라고 했었지. 아유무의 환영은 유독 특정 시점에 자신은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따지고 보면 이상했다. 환영은 어째서 그때 자신이 환영이라고 주장한 것인가? 쿄고쿠는 기억을 더듬어 그가 환영이라고 말할 때를 최대한 되짚었다.

“…….”

생각하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해 답은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그 답은 지금까지 떠오른 모든 의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지? 아니, 그냥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쿄고쿠는 손을 뻗어 레몬을 집었다. 상큼한 레몬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 향기에 어쩐지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 든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4.
오늘도 어김없이 하늘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었던 날은 과연 언제였을까. 맑았던 날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요근래의 날씨는 계속 흐리기만 했다. 흐린 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그날도 흐렸으니까. 비도 내렸던가. 요란하게 천둥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사이렌 소리였던가? 아니, 애초에 그날이 아니라 다른 날이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흐린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쿄고쿠는 형사라는 직업상 감이 좋았다. 물론 감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 감에 도움을 받은 적이 많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로 지금, 그 감이 불길하다는 신호를 연달아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위험해서가 아니라,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게 송두리째 무너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쿄고쿠가 원하는 바였다. 부디 이 모든 게 거짓이기를, 허탕이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너무나도 유능한 형사였고, 그의 감은 너무나도 좋은 편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맑고 깊은 파란색의 눈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영영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 파란 눈이 바로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 눈은 잠시 놀란 듯 하더니 이내 눈웃음이라도 짓는 것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마치 그날처럼.

“드디어 깨달으신 건가요? 여전히 둔감하시네요. 뭐, 예전보다는 아닌 것 같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먼곳에서 들려왔다. 음파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고막에 닿았다. 그래, 무릇 사람의 목소리란 이런 것이었다. 소리와 매우 닮았지만, 결국 실제로 진동하는 것은 없는 환청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숱없이 많은 환청을 들어왔지만, 이것이 환청이 아님을 쿄고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바로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환청임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여러 번 말했잖아요. 저는 환영이라고.

당연한 말이었다. 수수께끼의 테러리스트 ‘팬텀(환영)’은 아유무였으니까. 이것은 벌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외면조차 할 수 없었던 명명백백한 진실의 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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