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Lucida Stella

[레오이즈♀]세월을 넘어, 달을 찾아 본문

2차/단편

[레오이즈♀]세월을 넘어, 달을 찾아

시나모리 2019. 8. 14. 19:45

*일단은 이즈미 여체화인데....일부 묘사를 제외하면 남자로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망 소재 주의


츠키나가 레오는 자신의 집 앞에 서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눈을 다시 한 번 비볐다. 저 사람, 아무리 봐도 우리 집 앞에 서있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집을 잘못 찾았거니 싶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자신의 집 앞에 서서 어딜 갈 생각을 안 하는 걸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직업상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는 일도 잦았지만, 이번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은 그런 류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헛것을 보는가 싶어 혹은 행여나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눈을 계속 비비던 레오는 다섯번째로 눈을 비비고 다시 그 사람을 바라봤다. Q1. 헛것인가? A. 눈을 다섯 번을 비볐는데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헛것은 아니다. Q2. 아는 사람인가? A2. 내가 잘 잊어버리는 걸 감안해도 저런 사람은 살아 생전 본 적이 없다. 두 가지 질문에 답을 내린 레오는 눈 앞의 광경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엘리베이터 앞을 벗어나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누구세요? 아니, 무슨 일이세요? 외주 문의라면 이렇게 찾아오는 것보단 먼저 메일로 연락해줬으면 하는데.”

“……너, 내가 보여!?”

“아, 아니, 보이고자시고가 아니라 한참 전부터 우리 집 앞에 서있었잖아!?”

예상 외의 대답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았다. 생각보다 가는 탓에 레오의 손 안에 꼭 들어온 그 손목에서는 기분 좋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만져지는 걸 보면 확실히 귀신이나 유령 같은 건 아닌데! 아까 그 말에 내심 겁을 먹었던 레오는 손 안에 느껴지는 실체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손을 놓고 싶지 않아 계속 멍하니 손을 잡고 있던 레오는 손목의 주인을 빤히 쳐다봤다. 아담한 체구를 하고 있는 젊은 여성, 얼굴로 보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듯 싶었다. 웨이브진 은색 머리는 가슴께까지 물결치고 있었고, 눈꼬리가 야무지게 올라간 맑은 하늘색의 눈은 당혹스런 빛을 띤 채 레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듯 한참 후에야 손을 놓으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는 허스키한 편이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오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가출한 거야? 근데 어디 갈 데는 없고?”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나, 나는 그냥…….”

“우리 집이라도 괜찮으면 몇 밤 정도는 재워줄 수 있긴 한데. 지금 시간이 늦어서 너 혼자 들어갈 수 있는 데도 얼마 없을걸.”

그렇게 말하며 레오가 현관을 열자, 여자는 곤란한 듯이 눈을 굴리다가 결국 집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를 따라 들어가던 레오는 문득 ‘너무 자연스럽게 집에 들인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 *


수십 번을 고민한 끝에 데운 우유와 약간의 주전부리를 내온 레오는 맞은편에 앉아 뜨거운 탓에 얼굴을 찌푸리는 여자를 바라봤다. 혀를 살짝 내민 채 우유를 호호 불어서 식히는 그 모습이 정말로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사라질 무렵, 레오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 날이 완연히 풀리긴 했으나 해가 진 이후에는 아직 한기가 남아있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 레오의 앞에서 우유를 홀짝이는 이는 한쪽 소매만을 대강 꿰입은 탓에 가슴께가 완전히 드러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 해도 저렇게 입으면 감기 걸릴 텐데. 거기다가 입고 있는 기모노 자체도 고급스러우면서도 제법 연식이 있어보이는 데다가 얼굴과 쇄골 언저리에 있는 문신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인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떡하지? 하지만 이미 집에 들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시간에 쫓아내는 건 그렇지 않나? 거기다 여잔데? 아, 근데 진짜 예쁘긴 하다. 완전 내 스타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레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말에 그제서야 자신이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레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너 이름은 뭐야?”

“……세나, 세나 이즈미. 그러는 그쪽은?”

“아, 나는 츠키나가 레오! 세나, 어쩌다가 가출한 거야?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가출한 거 아니래두.”

레오의 질문에 새침하게 대답한 이즈미는 알맞은 온도로 식은 우유를 홀짝거렸다. 이즈미의 말을 믿지 않는 건지 레오는 그 이후에도 뭐라뭐라 계속 말을 늘어놓았지만 이즈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우유를 마실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텅 빈 컵을 힐끗 바라본 이즈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레오 군은 왜 날 들여보내준 거야?”

“어, 음, 그러니까…….”

이즈미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 레오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때 레오가 했어야 하는 일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레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레오는 상식과는 제법 동 떨어져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 섣불리 이즈미를 집에 들인 것은 경솔한 일이 맞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택시를 불러줘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때의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해낸 거지! 아아, 나 정말 바보! 천재지만 바보! 저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던 레오는 대답하는 대신 결국 질문을 이즈미에게 되돌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 그럼 세나는 왜 날 따라온 건데?”

“레오 군이 날 해칠 것 같진 않았으니까.”

K.O.패, 이건 명백한 레오의 K.O.패였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한 이즈미는 쿠키 하나를 입에 밀어넣고 오물거렸다. 그대로 탁자에 엎어진 채로 이즈미를 바라보던 레오는 뒤늦게 떠오른 답을 입에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되물어볼 게 아니라 어쩐지 내버려둘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 건데.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져가는 것을 느끼며 레오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역시 관두기로 했다. 실제로 이즈미를 해칠 생각 따위 눈꼽만큼도 없었고, 인간의 감이라는 게 생각외로 날카로운 것이라는 것쯤은 레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그렇게 탁자에 엎어져 있던 레오는 이제 쿠키에 흥미가 사라진 듯 먹는 걸 멈추고 이즈미 역시 자신을 빤히 바라볼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뭐, 어쨌든! 가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에 가기는 싫지?”

“가출한 거 아니라니까.”

“그럼 대체 누군데?”

“……요괴.”

“에, 거짓말.”

“왜 아까부터 계속 내 말을 안 믿는 건데!?”

“아니, 하지만 지금은 21세기고!? 솔직히 지금은 요괴보다는 외계인이 좀 더 그럴 듯 하지 않아? 아닌가? 외계인도 존재하니까 요괴도 존재하는 건가? 아, 잠깐! 대답하지 말아봐. 망상할 테니까!”

아, 혹시 세나도 사실 요괴가 아니라 외계인인 걸까? 하지만 외계인은 웃츄- 하고 인사하는데! 이즈미가 듣거나 말거나 계속 시끄럽게 뭔가 중얼거리던 레오는 이즈미가 그의 이름을 세 번째로 부르고나서야 비로소 말을 멈추고 이즈미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울리는지 얼굴을 찡그린 채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이즈미는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요괴란 거, 증명하면 되지?”

마찬가지로 레오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이즈미가 손가락을 탁 소리 나게 튕기자, 팟 소리와 함께 이즈미의 등 뒤에서 파란 불꽃 여러 개가 나타났다. 그와 더불어 노랗게 변한 이즈미의 동공과 피부 여기저기서 돋아난 은색 비늘은 적어도 그가 인간은 아님은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김과 동시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 모습으로 돌아온 이즈미는 어안이 벙벙해보이는 레오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믿지?”

“네, 믿습니다.”

“갑자기 웬 존댓말?”

“아니, 왠지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아서, 요.”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어느샌가 정좌를 한 채 존댓말을 쓰는 레오를 본 이즈미는 반응이 제법 재밌는지 작게 웃었다. 그 이후에도 아직 마음을 놓지 못했는지 이즈미의 눈치를 계속 살피던 레오는 부드러운 이즈미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그럼 세나는 왜 인간들이 사는 데로 내려온 거야? 요괴는 어디 숲 속 깊은 데 사는 거 아닌가?”

“왜? 쫓아내기라도 하게? 뭐, 상관없긴 하지만.”

“아니아니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세나 지금 그 모습으로 나가면 분명 해코지 당할걸.”

“애초에 내가 보인다고 한 사람은 레오 군 말곤 없었거든?”

“그렇다고 나 말고 세나를 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아예 없을 거라 보장은 없잖아. 어쨌든! 왜 인간들이 사는 데로 온 거야? 인간 구경?”

“……응, 인간 구경 하러. 인간들은 정말 빠르게 변하니까, 궁금해서 한 번 나와봤어.”

대답하기 전의 침묵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딱히 이즈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레오는 그런가보다 하고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괴라는 걸 알고 나니 지금까지의 상황이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의미로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으나 레오는 조금 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뭐, 레오 군한테는 내가 보인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슬슬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에,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괜찮은데.”

“나 가출한 거 아닌데도?”

“말했잖아, 세나 그 모습으로 나가면 분명 해코지 당할 거라니까? 돌아가고 싶어졌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낮에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나 요괴라니까? 정말 괜찮아?”

“딱히 세나가 날 해칠 것 같지도 않고……. 뭐랄까, 왠지 내버려둘 수 없다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느낌! 그러니까 원하는 만큼 있어도 괜찮아. 마침 남는 방도 있고.”

레오의 말에 이즈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신세 좀 지겠다고 답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준 레오는 방 좀 치울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라며 먼저 자리를 떴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던 이즈미는 어쩐지 애틋해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 * *


몸에 와닿는 낯선 감촉에 이즈미는 아직 잠기운이 가지 않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늘상 느끼던 서늘하면서도 딱딱한 느낌이 아닌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감촉.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즈미는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그렇지, 여기는 레오 군의 집이었지……. 딱히 자거나 몸을 따뜻하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제법 기분이 좋아 이즈미는 조금만 더 이불 속에 파묻혀 있기로 결정했다.


*


“……핫.”

저도 모르게 눈을 뜬 레오는 멍하게 주위를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자신의 집이었다. 그럼 아까 일어난 일은 꿈인 건가? 사실 지금이 꿈인 거 아닐까? 어느 게 꿈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고민하던 레오는 결국 자신의 볼을 한 번 꼬집어보고 나서야 지금 눈을 뜬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인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정말 생생한 꿈이었어……. 얼얼함이 느껴지는 볼을 문지르며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숲속이었다. 점점 흐려져가는 시야를 무언가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 나 지금 피를 흘리고 있구나. 분명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도 이상하게 레오는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음을 인지할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귀 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누군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였을 뿐. 목소리의 애타는 부름에도 불구하고 레오의 의식은 그저 심연으로 가라앉을 따름이었다.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꿈을 회상하며 레오는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아주 중요하고도 소중한 것을.


*


“아, 맞아. 세나. 나 오늘 이상한 꿈 꿨어.”

“무슨 꿈?”

“잠깐만. 이것만 치우고 말해줄게.”

마지막 한 숟갈을 입에 밀어넣은 레오는 입을 우물거리며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기껏 2인분을 준비했건만 이즈미가 딱히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이전과 다름 없이 간소했던 식탁 위는 레오가 입 안의 음식물을 삼킴과 동시에 모두 정리되었다. 다시 이즈미와 마주 앉은 레오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내가 죽는 꿈, 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죽는 건 별로 상관없는데……, 누가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어. 그래서 좀 신경 쓰여. 뭐랄까,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러네. 이상한 꿈이네.”

그외에 별 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문 이즈미를 빤히 쳐다보던 레오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그 꿈속의 목소리, 세나 목소리랑 비슷했던 것 같아! 뭐,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어진 말에 이즈미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으나 레오는 순간 이즈미가 움찔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세나?”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맞다, 레오 군은 뭐하는 사람이야?”

“갑자기 그건 왜?”

“그야 나는 어제 내가 누구도 뭐하러 나왔는지도 다 알려줬는데 레오 군은 이름만 가르쳐줬잖아. 이렇게 된 거, 나도 레오 군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봐도 명백하게 주제를 돌리려고 하는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즈미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 역시 명백했기 때문에 레오는 일단은 아까 전 얘기에 대해서 더 캐묻지 말고 순순히 이즈미 말에 대답하기로 했다.

“그런가……. 그럼 이참에 자기소개 다시 하지 뭐! 이름 츠키나가 레오, 나이는 21세! 현재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 중!”

“프리랜서?”

“음, 딱히 어디 고용되서 일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을 받는 사람? 나는 그쪽에서 먼저 찾는 편이긴 하지만!”

“용병 같은?”

“전투는 안 하지만 비슷하달까!”

그렇게 말하며 레오가 씩 웃어주자 이즈미 역시 살짝 웃는 것으로 화답해주었다. 그게 또 제법 취향이라─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봤을 때부터 취향이었다─ 이즈미를 빤히 쳐다보던 레오는 적당히 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만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세나는 인간 구경 다 했어? 오랜만에 나오는 거면 변한 게 진짜 많을 텐데!”

“안 그래도 어제 하루종일 눈이 핑핑 도는 줄 알았어. 어제 다 한 줄 알았는데 집 안에 있는 것도 신기한 게 많아서……. 오늘은 그게 뭔지 알아보려다 시간이 다 간 것 같고. 정말, 인간들은 너무 빨리 변해. 그렇게 오래 산속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번엔 얼마 만에 나온 건데?”

“한 백 년 좀 넘었나? 제대로 안 세서 더 오래 됐을지도.”

“세나 그렇게 나이가 많았어!?”

“왜 그렇게 놀라. 나 레오 군보다 두 자릿수 정도는 더 살았을걸.”

“엑,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뭐, 우리한테는 시간은 무의미하니까. 솔직히 이쯤 살면 나이로 우열 가르는 건 무의미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의외로 납득이 빠르네.”

“음-, 그야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에 굳이 인간의 기준을 적용할 필요는 없잖아. 세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레오 군은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런 말 자주 들어.”

레오의 대꾸에 이즈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흐응’ 소리를 내며 레오를 바라봤다. 분명 눈을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치,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그래, 세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레오는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어쩐지 묘한 기분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애써 무시했다.


* * *


“……세나, 세-나!”

“오늘은 무슨 일?”

“요 밑에 복숭아가 잘 익었길래! 세나한테도 먹여주고 싶어서! 오는 길에 내가 하나 먹어봤는데 과즙도 많고 엄청 맛있더라!”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품 안에 넣어놨던 복숭아를 꺼내 이즈미에게 내밀었다. 레오의 말대로 잘 익은 복숭아는 벌써부터 좋은 향기가 나는 게 제법 맛있어 보였다. 자신은 딱히 뭔가 먹을 필요가 없다면서 툴툴거리면서도 이즈미는 순순히 복숭아를 받아 들어 한 입 베어물었다. 입 안에 퍼지는 복숭아 맛이 퍽 맘에 들었는지 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맛있네.”

“그치, 그치? 맛있다니까-? 먹을 필요가 없다 해도 먹는 재미도 없는 건 아니잖아. 이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레오는 이즈미가 복숭아를 먹으며 듣는 둥 마는 둥 해도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식과 먹는 재미의 중요성, 그 외의 무언가─그 이후는 정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를 한참 역설하다가 고개를 홱 돌려 이즈미와 눈을 맞추며 ‘그러니까-!’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 이즈미가 화들짝 놀라자 레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나가 나한테 그동안 내가 몰랐던 걸 가르쳐준 것처럼 나도 세나가 몰랐던 걸 가르쳐 주고 싶단 뜻! 왜냐면 나는 세나를 정-말 좋아하니까!”

“……정말, 레오 군은 별나다니까. 애초에 인간은 같은 인간들이랑 사는 게 낫지 않아? 나 같은 요괴랑 이렇게 계속 어울리면 딱히 좋은 소리 못 들을 텐데.”

“으음-, 그치만 난 세나랑 있는 게 좋은데.”

솔직히, 세나랑 만나기 전에도 딱히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눈을 몇 번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서너 번 휘저었다. 이런 고민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냅다 이즈미의 무릎을 베고 누운 레오는 이즈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중요한 건 나랑 세나가 이렇게 만난 거잖아-? 난 그거면 충분해. 다른 건 필요없어. 세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아직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

“나,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한다니까…….”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은 듯 자신의 얼굴에 와닿는 손길이 제법 부드러운 것을 느낀 레오는 한 번 웃어주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발갛게 물든 이즈미의 얼굴이 꼭 복숭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츠키나가 레오가 비일상에 적응하는 것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삶 자체가 일반인 기준으로 볼 때는 일상보다는 비일상에 가까워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갑작스러운 동거인이 만들어낸 비일상은 어느새 레오의 일상에 편입되어 있었다.

“세나, 이렇게 계속 인간들이랑 있어도 괜찮아?”

“그건 왜? 슬슬 나가줬으면 좋겠어?”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할까, 정기? 라고 하나? 요즘은 그런 게 탁해져서 세나 같은 사람은 지내기 힘들거나 그런 거 있지 않나 하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만큼 신기한 게 많아서 상관없어. 솔직히 그 정도로 타격 받을 만큼 약하지도 않아.”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이즈미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 한 명만 찾으면 돌아갈 거야.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니까.”

“누굴 찾는 건데? 도와줄까?”

“누군지나 알고.”

“찾으려면 역시 누군지 알아야 하니까……, 예전에 알던 사람?”

“바보, 백몇 년 전 사람이 지금까지 퍽도 잘도 살아 있겠다.”

“우우, 바보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하여튼. 내가 알아서 찾을 거니까 레오 군은 도와줄 필요 없어.”

말을 마친 이즈미는 새침한 동작으로 손에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이즈미가 바보라고 한 탓에 꽁해져 있던 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역시 그것보다는 호기심이 이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그렇게 찾고 있는 걸까.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죽었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그 후손이라도 되는 건가? 아님? 이쯤 되면 슬슬 자신의 주특기인 망상을 동원할 법 했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자신의 망상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물어봐도 답 안 해주겠지? 모처럼 내가 망상을 안 하겠다는데! 세나는 바보! 바보 세나! 원래 바보라고 한 사람이 더 바보거든!? 레오가 이렇게 혼자 성을 내고 있자 이즈미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 채 얼굴에 마치 나 삐졌소라고 써놓은 것처럼 잔뜩 뾰로통해진 레오를 쳐다봤다. 그러나 딱히 달래줄 생각은 없었는지 이즈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이제 와서 이즈미를 따라가는 건 미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레오는 여전히 꽁한 표정으로 이즈미가 앉아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혼자 있으려니 어쩐지 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좀 가라앉으니, 아까 왜 그렇게 궁금해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 세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그런데 어째서 왜 이렇게 복잡한 기분이 드는 건지, 지금의 레오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다.


* * *


쏟아지던 비는 어느덧 굵은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씻어주는 비는 흘러내리던 눈물도, 느릿하게 흐르던 피도 모두 씻어내렸다. 비야, 멈추지 말아주렴. 모든 게 다 흘러갈 수 있도록.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즈미는 빗소리에 씻겨져 내린 말과는 다르게 품 안의 무언가를 꼭 끌어안았다. 비를 맞고 있어선지 원래 차가웠는지 모를 그것에서는 평소에 느껴지던 온기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오 군, 몸이 얼음장 같잖아. 그러니까 비 맞고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붉은색으로 엉망이었던 얼굴은 빗물에 씻겨진 탓에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이 비와 함께 모든 게 떠내려갔으면. 너도, 나도,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도, 모든 게 마치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젠가 이별의 날이 찾아올 거라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너와 나는 걸어가는 속도가 다르니까. 영원과 가까운 내 시간에 비해 네 시간은 그저 한순간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너무 빠르잖아.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아직 너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부는 바람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너는 제멋대로 날 찾아와서 그래도 떠나버렸어. 그렇네, 너는 원래 바람 같은 사람이었지. 그렇지만 내 안에 남은 너는 바람보다는 저 하늘의 별 같은 사람인걸. 단 한순간의 반짝임이지만 내 안에서는 영원히 빛날, 그런 별.

조금만 더 일찍 내 마음에 솔직했으면 좋았을까. 영영 이 마음을 전할 수 없는 날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말했으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만약 내 마음을 네가 들었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니, 네가 내게 말했던 그 ‘좋아해’를 내가 조금이라도 네게 돌려줬다면, 너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나는 솔직하지 못해서,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해서, 결국 이렇게 또 때를 놓치고 말았어……. 아무리 한탄해봐도 이제는 변명에 불과한 말들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비는 눈물과 섞여 이즈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자상하게 레오의 뺨을 쓸며 이즈미는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하지만 자신은 되돌려주지 않았던 그 말을 속삭였다.

“정말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이내, 그 목소리 역시 빗소리 속에 녹아 사라져갔다.


* * *


달이 밝은 밤이었다. 조심스레 커튼을 걷어낸 이즈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창문을 살며시 열었다. 제법 밝은 달빛이 곤히 잠든 레오의 얼굴을 비췄다. 달빛이라 해도 오늘은 달이 밝은 편이라 눈부실 만도 한데 레오는 좀처럼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일 때문에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보냈다고 했던가. 아직도 방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커피 냄새에 이즈미는 이런 향도 레오와 잘 어울리는구나 싶어 작게 웃었다. 지금의 ‘레오 군’은 이런 느낌이구나. 나쁘지 않아. 하긴, 내가 네 어떤 모습이 마음에 안 들까 싶지만.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레오 군’이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을. 잠깐 얼굴만 보고 올까 고민한 게 스무 해 가량이었다. ‘지금의 레오 군’이 스무 살 언저리였으니까 고민한 것 역시 그쯤 될 터였다. 물론 이즈미에게 있어 20년쯤이야 눈을 깜빡이는 정도가 아닌, 눈을 깜빡이기 위해 눈을 감고 다시 뜨기 전쯤 정도 되는 시간이었다. 결정을 내리니 찾는 데에는 딱히 애를 먹지 않았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저 잘 지내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이제는 유혈이 낭자하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였으니까. 물론 그가 자신을 볼 수 있었다는 건 의외긴 했지만.

“……하긴, 그때도 그렇긴 했지.”

레오와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이즈미는 살풋 웃었다. 그때도 여자애 혼자 이런 숲속에 있는 건 위험하다고, 혹시 부모랑 헤어진 거라면 찾아줄까냐고 물어봤었지. 어째 달라진 게 없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너’는 너라는 걸까. 약간 흐트러진 레오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즈미는 가만히 레오를 바라봤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인간과 요괴는 함께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면 모를까. 이는 그때의 레오 반응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레오에게 자신이 찾는 사람만 찾으면 돌아간다고 했으니, 언제 돌아가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분명 그 얄팍한 거짓말도 들키고 말 테고. 그러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하아…….”

복잡한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 말고도 문제는 또 있었다. 그때의 츠키나가 레오와 지금의 츠키나가 레오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 레오를 사랑했고, 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진실된 명제였다. 그 어느 순간의 츠키나가 레오여도 세나 이즈미는 그가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실 단 하나만으로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나 이즈미가 사랑하는 건 츠키나가 레오였지만, 세나 이즈미를 사랑해준 건 그때의 츠키나가 레오였지 지금의 츠키나가 레오가 아니었다. 이즈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잘 지내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려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이 꼬일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차라리 레오 군이 나를 볼 수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계속 레오 군을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레오를 원망하며 이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같이 지내니까,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단 말이야……. 지금의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막상 입밖으로 내뱉으니 어쩐지 서글퍼져 이즈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대답 없는 물음을 내뱉으며 이즈미는 여전히 곤히 잠든 레오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느릿느릿 눈을 뜬 레오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에 시야는 약간 희미했으나 인기척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나?”

손을 뻗어 확인해본 시각은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걱정해준 건가? 침대 곁의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든 이즈미를 제대로 눕혀주며 레오는 쓰게 웃었다. 하긴, 꼬박 하루를 잠으로 지새웠으니 걱정할 만도 하겠지. 이참에 고치는 게 좋으려나. 곤히 잠들었는지 깨지 않는 이즈미를 레오는 빤히 바라봤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예쁘고 레오의 취향인 얼굴이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이즈미에게는 어느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 미모를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할 것 같았다. 거기다 레오가 반한 점을 몇 개 더 더한다면 미사여구가 아닌 언어 그 자체가 부족할 게 틀림없었다. 왜 이제서야 만난 거지? 아니, 지금이라도 만나서 다행인가. 자신이 새삼 이즈미에게 푹 빠져 있음을 자각하며 레오는 이즈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행여나 이즈미가 깰까 싶어 조심스레 방을 빠져 나왔다.

꿈을 꾸었다. 아주 길고도 그리운 꿈을. 그 꿈 속에서 레오는 ‘그’였고, 레오 자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오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앳된 감정인 동시에 길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어디 하나 바래지 않은 감정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그때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오히려 지금까지 기억해내지 못한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감정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맞는가? 행여 조금이라도 ‘그’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가 자신인 것은 맞지만, 둘이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으니까. 이럴 거면 떠올리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까. 막 내린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레오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그동안 신세졌어.”

“엑, 세나, 갑자기 무슨 말?”

간만에 보는 이즈미의 원래 모습에 레오는 눈을 크게 떴으나, 이즈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의 눈을 더 크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레오의 반문에 이즈미는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대답했다.

“찾는다는 사람, 찾았거든. 이제 여기 있을 이유 없으니까 슬슬 돌아가려고. 그냥 갈까 하다가 역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찾았다니까 잘됐네. 그 사람은 잘 지내는 것 같아?”

“응, 다행히도.”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네! 하지만 나, 세나가 떠난다면 잘 못 지낼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던 이즈미는 순간 레오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레오를 쳐다봤다. 크게 놀란 이즈미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아까와 다름 없는 표정을 한 레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에, 왜 그렇게 놀라? 세나가 찾던 사람 나 아니었어? 아니면 좀 쑥스러운데-”

“그걸. 어떻게……?”

“음, 기억이 났다고나 할까. 어쩌다보니 전생체험을 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까? 그래도 나는 내가 기억해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세나는 아냐? 세나 혼자 알고 있는 건 불공평한걸.”

“……역시 너무 오래 있었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다 내 잘못이야……. 고개를 숙인 채 자책하는 말을 늘어놓던 이즈미는 한 번 숨을 크게 들이키고 머리를 들었다. 제법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즈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레오 군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건 나 때문일 거야. 내가 계속 레오 군 곁에 머무르는 바람에 레오 군이 그 영향을 받은 거겠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세나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오히려 고마운데.”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고민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덕분에 이즈미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즈미를 붙잡을 수 있는 구실이 하나 더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오래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결론은 놀랄 정도로 간단했다. 따지고 보면 고민에 오래 걸린 까닭도 전생이 지금의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인정한 이후에 시간이 또 오래 걸릴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즈미한테 고마운 것 역시 당연지사였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또 여러 가지 있었지만. 말을 마친 레오는 잘 이해가 안 되는지 눈만 연신 깜빡거리는 이즈미를 빤히 바라봤다. 살짝 물기가 어린 눈이 이름처럼 산 속 깊은 어딘가에 있는 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얼굴을 붉히는 것 역시 귀여웠다. 안타깝게도 입을 열 기미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이즈미의 모습에 레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돌아갈 거야? 난 세나가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

“왜 그러는 거냐고? 그야 내가 세나를 좋아하니까! 전생의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나는 기억이 나기 전부터 세나를 좋아했으니까! 아, 운명일지도 모르겠는걸! 전생 때부터 내려온 운명의 빨간 실로 엮인 관계 같은 거 아닐까? 앗, 지금 좀 영감이 떠오르는 기분☆”

“정말로 괜찮아? 나는…….”

“괜찮고말고! 중요한 건 내가 세나를 좋아한다는 거니까! 만약 세나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세나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만들 테니까!”

“조,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는걸……!”

아차. 이즈미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레오가 그가 한 말을 듣고 난 이후였다. 이즈미의 말에 바로 화색이 된 레오는 잔뜩 신이 나 이즈미를 꼭 끌어안았다. 응, 나도 세나를 정말정말 좋아해!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자신을 꼭 끌어안는 서늘한 손길을 느낀 레오는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어느덧 게시글 번호 수가 세 자리가 되었습니다...감개무량합니다...100번째 게시글은 쵱컾으로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일상이라든가 좀 더 넣고 싶었는데 그럼 질질 늘어질 것 같아서 결국 뺀 게 조금 아쉽습니다...ㅇ<-<...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