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a Stella
[리리리즈]선물 본문
※TS 주의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고쳐 잡으며 리즈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얼추 다 처리했으나, 가장 강해보이는 것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였으니까.
“저기, 너 말이야. 내가 지금 많이 지쳤거든?”
‘그러니까 얼른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리즈는 살짝 조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어도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마물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도리어 리즈를 공격했다.
“큭……!”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피한다고 피한 건데, 아까의 싸움으로 좀 지친 탓일까. 리즈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제법 세게 맞은 탓인지 피가 진득하니 손에 묻어나왔다. 아, 잠깐. 나 머리핀은 어디 갔지……!?
“야……, 너……. 지금 당장 죽을 준비 해. 미친 새끼야.”
흐르고 있는 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통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그의 분노를 담은 듯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한 마물에게 리즈는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붉은 화염의 사이로 무수한 핏방울이 쏟아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머리핀……. 머리핀…… 어디 갔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체마저도 산산조각으로 찢어버린 이후 리즈는 검을 집어넣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무언가를 찾아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걸까? 아냐, 그건 아닐 거야. 피가 얼굴을 타고 땅바닥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잊고 있었던 고통도 다시 되살아났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 애써도 눈꺼풀은 계속 아래쪽으로 떨어지고만 있었다. 아직, 아직은 안 돼. 아직은……!!!
* * *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많은 마물들이 빠져나온 터라 평소보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부상자의 수도 많았다. 다행히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멀리 마물을 잡으러 간 이도 속속들이 집합 장소로 돌아왔으나,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리즈 선배는 어디 갔어? 아직 안 돌아온 거야?”
“그러네. 평소라면 가장 먼저 돌아와서 기다릴 사람인데.”
이상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였다. 언제나 가장 많은 마물을 상대했으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가장 먼저 돌아와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던 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다 모였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렇지만……!
“혹시 리즈 선배 어디로 갔는지 알아?”
“아마 저쪽으로 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다녀올게. 잠깐만 기다려.”
“아아, 물론.”
그 불길한 예감이 맞지 않기를 기원하며 프리드리히는 동료가 가리킨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닐 거야. 그렇지? 아닐 거라고 말해줘. 오늘은 그냥 마물이 너무 많아서 조금 더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라고.
*
피비린내가 풍겨져 왔다. 익숙해진 냄새이지만 그 꺼림칙함에 프리드리히는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대체 선배는 어디 있는 거지? 더 먼 곳을 찾아봐야 하나, 하는 순간에 쓰러진 누군가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무언가를 찾다가 그만 쓰러져 버린 것 같은 모습, 검은 바로 그 옆에 놓여 있었으니 검은 아닐 것이다. 그럼 대체 뭘 찾다가 이 지경이 된 거지? 언제나처럼 틀어 올리지 않고 이리저리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프리드리히는 잠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쓰러진 리즈를 안아 올렸다. 여리게나마 쉬고 있는 숨이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고는 있었으나, 그다지 괜찮은 상황이 아님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급하게 리즈를 업고 검을 챙겨 자신이 온 방향으로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몸을 지배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숨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리는 방 안,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리즈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직도 그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프리드리히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이후로 레지멘트의 대부분이 그곳에서의 임무를 꺼리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상처를 입었지만 바로 돌아왔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바로 돌아오지 않은 거지? 바로 지혈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무엇이 그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게 한 거지? 의문의 연속이었다.
“리즈…….”
프리드리히는 서글프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계속 방 안에 감돌고 있었다.
*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미색의 천장이었다. 리즈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아, 대체 얼마나 잔걸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리즈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서, 선배, 일어났어……!?”
“호들갑은.”
눈에 띄게 흥분한 모습에 리즈는 살짝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정말, 흥분도 정도껏 하라구.
“다들 걱정했다고, 선배. 대체 무슨 일로 빨리 돌아오지 않은 거야?”
“엣, 그게…….”
당황한 듯 리즈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살짝 가린 채 말을 흐렸다. 확실히 자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왜 그러는 거야, 선배……? 말할 수 없는 거야?”
“아니, 그건…… 그건 아니지만…….”
“대체 뭔데……?”
아, 몰라. 얘라면 말해도 괜찮을 지도. 리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대답했다.
“……머리핀. 그게…… 사라져버려서…….”
“……하아?”
으,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어……!!! 리즈는 확 불이 오른 얼굴을 가리며 프리드리히의 눈을 피해 버렸다. 프리드리히 역시 어이가 없는 듯 ‘머리핀……?’을 계속 반복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그깟 머리핀이 뭐가 중요하다고 안돌아 온 거야……!?”
“그, ‘그깟’ 머리핀이라니……!!! 나, 나는…….”
“그거 하나 사라졌다고 쓰러질 때까지 그걸 찾고 있었던 거야? 난 또 뭐 중요한 거 잃어버린 줄 알았네……! 아니, 선배한테 그게 중요하다고 쳐. 그렇지만 선배를 걱정하는 나나 다른 사람들 생각은 못 하는 거야? 지금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
“선배, 내 생각보다 훨씬 나쁜 사람이었네. 내가 너무 과대평가한 거야? 실망했어.”
“……나가.”
시트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화가 났다. 너, 그게 정말 나한테 어떤 의미를 가진 거였는지는 알기는 해? 아니,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나 해?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딴 말이나 지껄이려고 왔으면 닥치고 나가버려! 나가!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나갈 거야. 나도…… 나도 선배 굳이 보기 싫으니까……!”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납게 문이 열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닫혔다. 손이 화끈한 것 같아 바라보니 시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능력이 반응한 탓일 것이다. 탄내가 코를 매섭게 찔렀지만 지금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흘러나와 한 쪽 뺨과 베개를 적시기 시작했다. 펑펑 울고 싶었다. 무엇이 그리 슬프고 무엇이 그리 사무친 것일까. 그건 나에게만 소중하고 귀한 기억이었을까?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했을까?
이윽고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 전체를 가득 메웠다.
* * *
허리 정도까지 내려온 긴 머리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넘실거렸다.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뒀더니 어느새 이리도 많이 길어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짧게 잘라버리는 편이 낫겠지. 아니면 아예 숏컷으로 하는 게 나을라나? 아예 그게 나을지도. 리즈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선배!”
“아, 프리드리히. 왜?”
“아니, 그냥. 늘 용건이 있어야 하나.”
“싱겁기는.”
‘엑, 너무하잖아.’ 외마디 탄식을 내뱉고는 프리드리히는 리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 몇 주일 동안 마주치지 못한 이는 역시나 어딘가가 달라보였다. 그동안 좀 여유가 있었으니 잘 쉬고 있었을라나. 그는 에이스였고, 소중한 전력이었다. 하찮은 임무에 남용하지 말자고 위에서 판단한 것인지 요즘 들어 좀처럼 그가 임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따분했다며 기지개를 쭉 피는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드리히는 또 다시 바람에 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웬 일이야? 평소에는 방해 된다면서 조금만 길어도 잘라버리더니.”
“뭐, 요즘 출동하는 일도 없었고, 자르기 귀찮아서 내버려뒀더니 이렇게 길어버렸네. 슬슬 잘라야 할까나……. 이번엔 아예 이 정도로 짧게 치려고, 어떻게 생각해?”
리즈는 목덜미 위쪽을 톡톡 가리키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정도면 누가 뒤에서 보면 남자로 아는 거 아닐까———— 그러면 조금, 조금은 곤란한데.
“아깝지 않아? 난 지금 이게 더 맘에 드는데.”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
“……너도 알고 있잖아. 내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불의 힘에서 비롯된 능력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 능력을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능력을 자기 멋대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다 하지만은 그도 그 나름대로 조심은 하고 있었다. 이 난폭한 불은 언제 어디로 튀어 제멋대로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었다. 행여 전투 중인 누군가에게 그것이 옮겨 붙으면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자신에게 불이 옮겨 붙으면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가 늘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이유였다. 긴 머리만큼 불이 잘 옮겨 붙는 것도 얼마 없었다.
긴 머리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여자의 로망이라고 하지만, 그건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가 오고 가는 이곳에서는 중요한 게 아니야. 살아남아야 해. 「미」의 추구는 그 다음이야.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걸. 그렇지?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되뇐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럼 묶으면 되지. 꼭 잘라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귀찮아.”
“너무해, 선배~”
“너 그거 아양 떠는 거면 확 불 붙여 버린다.”
“히이이익…….”
‘알았어, 안 할게. 안 하면 되잖아.’ 희미한 살기마저 느껴지는 기분에 프리드리히는 손을 내저었다. 에휴, 정말 다 큰 남자가 뭐하는 짓이냐고. 리즈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흠……, 어쨌든 그냥 묶으라니까? 뭐, 얼마나 걸린다고.”
“글쎄, 생각해보고.”
또 다시 바람이 불었다.
*
“앗, 아직 선배 머리 안 잘랐네. 잘 됐다. 선물이야.”
“이게 뭔데?”
“열어보면 알아.”
며칠 후, 저 멀리서 리즈를 발견하자마자 냉큼 달려온 프리드리히가 내밀은 것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얘가 이런 걸 나한테 주는 이유가 대체 뭐지? 리즈는 의문—어쩌면 의심일지도—이 가득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하얀 솜이 가득 채워진 그 가운데 살짝 올려져 있는 것은 은빛의 머리핀이었다.
“어때? 맘에 들어?”
“마, 맘에 들긴 들지만……. 이런 걸 나한테 주는 이유가 뭐, 뭔데……?”
“음, 그냥? 머리 묶고 이렇게 꽂아주면 더 낫잖아. 그렇지?”
“그, 그렇지만…….”
“자, 얼른 해봐. 아, 머리끈도 필요해?”
“아냐, 있어.”
리즈는 머리를 대충 한데 모은 뒤 머리를 고정시키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탓인지 손은 계속 헛돌았다. 프리드리히는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지은 후, 직접 그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곱게 틀어 올려진 머리 위에서 빛나는 은빛 장식.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잘 어울린다. 그치?”
“……몰라.”
“그래, 그래.”
정말 솔직하지 못한 아가씨라니까———— 그래서 그다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리드리히는 차가운 반응에 불구하고 환하게 웃었다.
*
아침마다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손에 익어버린 터라 이제는 하지 않으면 어딘가가 허전했다. 아, 혹시라도 이걸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 * *
가냘픈 흐느낌이 들려왔다. 프리드리히는 문에 기대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독설을 퍼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는 자기 몸도 챙기지 않고 다른 것에 열중했다는 것에 화가 나버려서 그런 말을 해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흐른 이후, 흐느끼는 소리가 멎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보니, 울다 지쳐 잠들어 버린 듯 붉게 부은 눈을 감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로 젖어버린 베개가 마음을 쿡쿡 찔러왔다.
“선배…….”
불러보아도 이미 깊게 잠들어 버린 듯 느린 숨소리만이 돌아왔다. 프리드리히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 잠에서 깨어나면 맘껏 때려도 괜찮아. 하루 내내 기합만 줘도 괜찮아. 미안해. 정말로.
“그럼 푹 쉬어.”
아직도 눈에 매달려 있는 눈물과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 * *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오래 운 탓일까. 울다 지쳐 잠들어버렸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얼굴에 찜찜한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눈물 자국이 잔뜩 남아있을 텐데————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슬슬 일어나야지. 언제나처럼 머리를 묶고 언제나 머리핀을 놓아두었던 자리에 손을 가져갔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아, 그래. 그거 잃어버렸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또 다른 반짝임이 눈에 띄었다.
“……?”
은빛으로 빛나는 불꽃의 나비였다. 나비의 모양이었지만 그것은 은색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가 주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직감적으로 누가 주고 간 것인지 리즈는 알 수 있었다.
피부에 와 닿는 금속의 느낌은 서늘했으나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퍼져 나갔다. 바보, 정말 바보잖아, 너.
두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프리드리히!”
“아, 선…… 배!?”
“어라랏, 왜 놀라고 그래.”
프리드리히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리즈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언뜻 보면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미소는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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