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a Stella
[아이에바]어느 겨울 본문
※TS 주의
아이자크와 나는 소꿉친구다.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둘의 부모님은 친한 이웃사촌이었고, 우리 둘도 자연히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늘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런데…….
내 눈이 어딘가 이상해졌는지, 아니면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요즘 들어 이 자식이 멋져 보이기 시작한 거다. 거기다 키도 훌쩍 커져서 뭔가 어른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아, 분명 어렸을 때는 내가 더 컸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눈높이가 비슷해지더니, 지금은 나보다 한 10cm는 큰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얼굴도, 어렸을 때는 좀 여리여리했던 것 같은데. 이젠 선도 좀 굵어지고. 뭐랄까, 이제 완전 어른스러웠다는 느낌도 드는 것 같고……? 그리고…….
“뭐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내가 언제?”
아이자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어느새 아이자크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왠지 두 뺨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눈치 못 채는 것도 이상한 거다. 내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아이자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해?”
“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구, 놀래라. 그렇다고 크게 대답할 필요는 없잖아. 근데 너 얼굴이 너무 빨간 거 아냐? 열이라도 있나?”
“아니거든? 나 완전 멀쩡하거든?”
순간 당황해서 목소리가 크게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 해서 조금 앞에 서서 걸었다. 그렇지만 보폭 차이 탓인지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살펴보더니 갑자기 자기 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음……, 좀 뜨겁긴 하지만 그렇다고 열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감기 조심해라? 요즘 감기 독하다고.”
“진짜 나 완전 멀쩡하다니까? 너나 조심하라고!”
방금까지 장난스럽다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게 또 얄미워서 괜히 사나운 말투로 톡 쏘아붙이고, 등을 한 대 세게 후려친 다음에 도망치듯 골목을 달려 최대한 빨리 집에 들어가 버렸다. 거울을 보니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닌데 두 뺨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 * *
괜히 기분이 안 좋아져서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안경도 반쯤 던져버리다시피 한 탓에 시야는 온통 흐릿했지만, 그 녀석의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정말, 걔랑 알고 지낸 게 10년은 훨─씬 넘었을 텐데, 요즘 들어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진짜로. 갑자기 이렇게 멋져지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전혀 아니네요, 이 사람아!!! 그 자식은 그냥 친구잖아. 그래, 그냥 친구. 그렇지? 그런데 아까 등을 후려쳤을 때 등이 되게 넓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아아, 몰라 몰라 몰라!!! 걔랑 나는 그냥 친구니까!!! 절대, 저─얼대 좋아한다거나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계속 떠오르는 생각에 괜히 죄없는 베개만 퍽퍽 때렸다.
* * *
“후우…….”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는 일은 별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잘 아는 사람의 집일 때는 더더욱. 하지만 한동안 아이자크를 일부러 피해 다녔더니, 아무것도 아니었던 이 일이 ‘별 일’이 되어 버려서, 이렇게나 긴장되는 것이다. 결국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해서 마음을 진정시킨 이후에야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띵동-’하며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괜히 야속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인터폰을 통해 약간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라, 에바.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아니다. 어차피 나갈 참이었거든. 금방 나갈게.”
나갈 참? 얘가? 이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문이 벌컥 열리고 아이자크가 나왔다. 얘가 웬 일로 이 시간에 이렇게 멀쩡한 모습이야……?
“미안, 많이 기다렸냐?”
“별로. 그냥 인터폰으로 얘기해도 되는데 뭘 굳이 밖에서…….”
“나도 마침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다니까. 그래서, 무슨 일?”
“아니, 그냥……. 딱히 별 일 없으면 같이 쇼핑이나 하러 가자고. 나, 장갑도 새로 하나 사야하고……, 또…….”
좋아, 갑자기 밖에서 얘기하자고 해서 조금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잘 말한 것 같다. 같이 쇼핑 간 적도 여러 번 있으니까 딱히 이상한 부탁도 아니고. 마침 나가려고 한 참이라고 한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아직 애한테 무슨 여자 친구라든가 그런 건 딱히 없으니까 당연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당황한 표정이 되어가지고는,
“아, 어쩌지……. 나 오늘 약속 있는데. 다음번에 가면 안 돼?”
이런 거절의 말이나 내뱉는 것이었다. 물론 이럴 수도 있지만, 괜히 짜증이 나서 ‘됐어. 그럼 나 혼자 갈 테니까.’라고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치만 짜증나……!!!
*
일단 혼자 온다고 왔지만, 기분이 이렇게 엉망인데 쇼핑이 제대로 될 리도 없고, 그날따라 마음에 드는 건 또 거의 없어서 온 보람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버스비가 아까워서 괜히 이리저리 상가를 돌아다니다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 아이자……!”
무심결에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다가 또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에 입을 손으로 막고 급하게 몸을 숨겼다. 얼굴만 살짝 내밀어 그쪽을 다시 바라보자 누군지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여자애랑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오늘 있다던 약속이 데이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서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힘껏 달리고 있었다.
* * *
“음? 방금 누가 여기 보고 있었던 것 같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남자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여자가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냥 네 착각인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남자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그것에 남자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쳐냈다.
“이러지 마. 누가 보면 오해하잖아.”
“어머? 어떤 오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남자의 가시 돋친 말에도 여자는 아랑곳 않고 또 다시 웃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얘는 대체 뭔 생각인 건지.
“어쨌든 오늘은 신세졌다. 고마워.”
“뭘 이정도로. 후훗, 잘해봐.”
“안 그래도 알아서 잘할 거거든?”
* * *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저놈의 알림은 왜 또 쓸데없이 밝은 건지. 그래도 혹시 몰라 핸드폰을 확인해봤더니 역시나였다. 이 자식은 여친도 있는 주제에 왜 계속 나한테 연락하는 거야!!! 괜히 짜증나서 핸드폰을 침대에 집어던져 버렸다. 잠도 없나, 지금 12시가 넘었는데……. 아, 몰라. 졸려. 잠이나 자야지…….
*
‘띵동- 띵동-’
“으응……. 아침부터 누구야…….”
진짜 집에 아무도 없나……? 하다가 이미 부모님은 출근하시고도 남을 시간이란 게 떠올랐다. 손을 더듬어 안경을 끼고는 대충 위에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인터폰을 눌렀다. 대체 누군지 얼굴이나 좀……. 어라?
“와, 진짜 일찍도 나오네. 추우니까 빨리 문 좀 열어줘.”
“……나 아니면 어쩌려고 다짜고짜 반말이야.”
“지금 이 시간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됐고 추우니까 얼른 문 좀 열어달라니까.”
“네, 네~”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으로 가 문을 열려는 순간, 지금 내 몰골이 생각났다. 머리는 100% 헝클어져 있을 것이고, 세수도 안 한데다가 구겨진 잠옷에 카디건……. 그러다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는 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 어차피 얘한테는 난 그냥 친한 여자애일 뿐이고, 무슨 일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짠! 생일 축하……, 뭐야, 너 방금 일어났냐?”
“사, 사람이 방금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내 생일……, 이었지.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것도 잊고 있었다. 잠깐,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생일 축하해, 에바. 어차피 저녁에 부모님이랑 케이크 먹을 거니까 그냥 조각 케이크로 사왔어. 먹을 거지?”
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짜증나.
“야.”
“뭐야, 갑자기 왜?”
“너 진짜 뻔뻔한 거 아냐? 너 여친 있잖아.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난 네 넘치는 애정 같은 거 받을 생각도 없고, 받기도 싫거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건 뭐, 진짜 갖고 놀자는 것도 아니고!
“여친?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시치미 떼지 마. 내가 저번에 어떤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거 봤……!”
아, 이런. 순간 감정이 폭발해 쌓여있던 말들을 쏟아내다가 당황해서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건 꼭 질투하는 거 같……, 아니 질투하는 거 맞긴 맞지만 그렇다고 본인한테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눈을 살짝 들어 아이자크 쪽을 바라보니 본인도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오고 간 이후에 아이자크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흠, 흠……. 에바, 일단 네가 오해를 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오해?”
“일단 난 여자 친구 같은 건 없고……. 저번에 어떤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거 봤다는 거, 그거 저번 주 토요일이야?”
“…….”
차마 대답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이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설마 날 본 건가?
“아아, 역시. 말하기 뭐해서 그냥 안 말하려고 했는데. 그거 사실 네 생일 선물 때문에 아는 여자애한테 부탁한 거라고. 너도 알다시피 내 센스가 좀 안 좋잖냐.”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자크는 선물 꾸러미 하나를 쓱 내밀었다. 일단 받긴 했지만, 이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전에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 선물 꾸러미로 얼굴을 가린 채 굳어 있던 나는 아이자크가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른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에바, 에바! 야, 에바리스티! 뭐야, 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조, 조용히 해……!”
“벌써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데……. 아, 그리고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모르겠다.”
뭐야, 뭘 또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조그맣게 뭔가 중얼중얼 거리던 아이자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또 하나 꺼냈다.
“하, 진짜……. 이런 분위기에서 말하긴 또 그렇지만……. 좋아해, 에바. 아니, 에바리스티. 솔직히 아까 네가 오해했을 땐 좀 기분이 뭣했는데……, 아니, 변명은 됐다. 우리, 사귈래?”
“뭐, 뭔 고백을 그, 그렇게 해…….”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닐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둘 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서 있다가 지금 내 몰골이 다시 생각났다.
“자, 잠깐. 나 지금 완전 엉망인데……!!! 왜 하필이면 지금……!!!”
“괜찮아 괜찮아. 넌 그 모습도 예뻐.”
“아, 몰라~~~!!!”
그래도 나름, 해피엔딩……?
손에 낀 반지가 나른한 겨울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어느 한날의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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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 : lily white 2집 너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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