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1차/단편 (26)
Lucida Stella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한다. 좀 더 오래, 좀 더 많이, 좀 더 가까이, 그렇게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만 언제나 생각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아니, 말조차도 꺼내지 못한다. 어째서? 이렇게나 원하는데, 이렇게나 바라고 있는데, 어째서?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변해버렸는데,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선배님은 모르고 계시니까.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선배님이 싫어하시기라도 하시면……? 그게 너무 싫어서, 그게 너무 두려워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하지만 아무리 억눌러봐도, 아무리 싫다고 해봐도 한 번 시작된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
달조차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깊은 밤이었다. 잠자리에 누운 지도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을 터였지만 에인은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탓일까? 아니, 잠귀가 아무리 밝다 해도 그 정도 소리로 잠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중요한 건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옆에서 같이 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기억조차도 제대로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거의 혼자서 잤고, 설령 부모님이라 해도 같이 잔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데, 그 누군가가 자신이 지금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에인이 잠에 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후우……..
구름 사이로 살며시 내리쬐는 햇살은 눈이 부시거나 따갑거나 하지 않고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따사로웠고,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며 에인은 살짝 위를 올려다 보았다. 넓게 그늘을 드리운 나무는 햇빛을 받아 연두빛으로 빛나는 나뭇잎을 그들의 머리 위에서 흔들고 있었다. “어때? 나오길 잘했지?” “……그러네요.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에이~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는데~” 헨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자 에인은 대답하는 대신 얼굴을 붉히며 괜히 다시 머리를 매만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내음도 좋았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그러나 역시 말하기에..
“이건 절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서너 번을 반복한 말을 에인은 다시 입에 올렸다. 본인 스스로도 꽤 입에 올리기 싫은 이야기이기에, 같은 말을 계속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 비어버린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에인은 상대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충분히 말했습니다. 그래도 듣고 싶으시다면, 들어 주십시오.” 뽑아도 뽑아도 뿌리만 남아 있으면 다시 자라나는 잡초마냥, 영원히 저를 괴롭힐 이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 * * 벌써 10년은 된 일이었다. 날짜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안경을 갓 맞췄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환하게 밝아진 날이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하필이면 그날 안경을 맞췄나 싶었다. 그 모습을, 그렇게 선명하게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
정갈한 글씨체의 갈색 편지 봉투, 그리고 약간 화려한 글씨체의 흰색 편지 봉투. 생일 축하한다.네가 내 아들이라 정말 고맙구나. 생일 축하해, 우리 아들. 너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엄마에게는 너무나도 기쁜 일이란다.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아프는 바람에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었다는 게 늘 미안할 뿐이란다. 다른 애들처럼 조금 더 칭얼대도, 어리광부려도 좋았을 텐데, 우리 아들은 너무 빨리 철이 든 것 같아서 엄마는 그게 항상 미안해. 지금이라도 더 많이 챙겨주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우리 아들이 너무 커버린 것 같기도 하네.늘 말하지만 오늘은 네가 축하를 받아야 하는 날이란다. 엄마한테 감사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니까? 엄마는 네가 이 세상에서 우리 집을 골라준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걸. 그것만으..
피가 묻은 속옷을 아무렇게나 쑤셔넣으며 스즈네는 작게 혀를 찼다. 놀라거나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떤 건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고, 때가 온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거추장스러운 게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아, 지금 이 불쾌감도 ‘이 현상’의 영향 중 하나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더 불쾌해졌다. 몸은 매우 정직했다. 그 몸의 주인이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옛날부터 그 반대의 성별로 살아왔더라도, ‘그’의 생각, 가치관, 생활습관, 하물며 그가 그 자신을 진짜 「남자」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녀’의 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충실하게 「여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로 확실해졌음을, 스즈네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절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