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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a Stella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도착한 에인은 늘 그랬던 것처럼 바위 주위를 맴돌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은 오지 않는데, 올 수 없는데. 그러니 더 이상 이곳에 올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정신을 차려보면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한참을 그렇게 의미없이 맴을 돌던 에인은 미처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저기, 괴물!” “사라져!” 질색하는 목소리와 함께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에인의 뺨을 스쳐지나가며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급하게 몸을 숨긴 에인이 손가락으로 상처를 훑으니 약간의 피가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아프지는 않았다. 인어에게 이 정도 상처 따위는 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낫는 것이었다. 그것보다는……. “……괴물, ..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근 에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아 토해려 해도 토할 것조차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구토감이 밀려오는 건지. 그렇게 한참을 비워지지 않는 속을 비워낸 에인은 손으로 입을 문지른 후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을 지우거나 머리를 풀거나 하다 못해 안경을 벗을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지? 어차피 모든 게 불편한데. 그렇다. 모든 게 불편했다. 지금의 격식 차린 차림이 아니어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어도 그것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예전에 입던 옷보다 몇 배나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이어도, 예전에 자던 침대보다 몇 배나 부드러운 침대에서 잔다 해도..
※고어 주의... 사람 하나 대동하지 않은 채 에인은 띄엄띄엄한 횃불만이 빛이 전부인 계단을 내려갔다. 절반쯤 내려 갔을까, 밑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냄새에 에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반은 남았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와, 왕비님!? 이, 이런 곳엔 어찌…….” “뭐, 저라고 해서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는 법 같은 건 없지 않습니까.” 놀란 듯한 고문관의 말에 에인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벽 한쪽에 묶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의 그 지독한 냄새의 근원은 이 남자일 것이다. 에인은 잠시 시선을 돌려 고문관들에게 말했다. “……미안, 지금 예의를 차리기가 좀 뭐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왕비님이신걸요.” “뭐……, 됐고. 잠깐 대화를 하고 싶으니까 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인은 들어오라고 말하며 읽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얼마 안 가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한동안 맴돌던 무거운 침묵을 깨며 에인은 먼저 말을 꺼냈다.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제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편하게 얘기하도록 할까요.” “왕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듣자하니 최근에 폐하께 저를 폐비할 것을 요청하는 서명을 올리셨더군요.” 말을 마친 에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작게 ‘폐비, 폐비라…….’ 라 중얼거렸다. 에인의 말에 상대는 흔들림 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답했다. “폐비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
“야.” “무슨 일인가요, 상훈?” “너 말이야, 그 귀신 쫓아다니는 것 좀 정도껏 해. 오죽하면 니 수호령이 내 꿈에 나오겠냐!?” “네!? 제 수호령이 상훈 꿈에 나왔다구요!? 어째서!? 왜!? 왜 제 꿈이 아니라 상훈 꿈에 나오는 건데요!? 아니, 이게 아니지……! 어떻게 생겼어요!? 대화는 나눴나요!? 말해주세요!!!” “너 내 얘기 듣고 있긴 하냐!?” 오늘 꿈 얘기를 하면 얘가 좀 진정을 할까, 하고 꺼냈던 말인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저거,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대체 며칠이나 걸리려나…….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건데. 상훈은 대답을 재촉하는 아카리를 피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야, 내가 말할 틈은 줘야 대답을 하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아, 맞다.” 계속되는 질문에 상훈이 짜증이 난..
“오늘 헤어지면 이제 또 한동안 못 만나는 건가?” “……예. 그럴 겁니다.” “뭐, 어쩔 수 없나. 얼른 에인이 졸업했음 좋겠네-” “그, 그건 저도…….”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에인을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거의 항상, 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나는 텀이 길어졌기 때문에 그 손길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작별의 시간이었다. “아, 이젠 정말 헤어질 시간이네……. 나 이만 갈 테니까 오늘 잘 자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아프지 말고, 알겠지?” “……예, 반드시 그럴 테니까……. 그, 그럼 선배님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푸흐흐, 알겠어. 그럼 좋은 밤, 에인.” ..
※BGM 有 잘 지내고 계십니까, 선배님? 저는……, 이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선배님이 정말 많이 보고 싶다는 걸 뺀다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주위의 모든 것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선배님을 닮아 있어서, 그래서 어느 걸 보더라도 선배님이 생각나 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선배님이 더 보고 싶어져서, 그래서……. ……선배님이 지금 제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절실히 느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항상 서로가 함께일 수는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겪게 되니 그 허전함은 상상 이상보다 더 커서……, 차라리 시간을 돌려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마저 해버리고 맙니다. 그럴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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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에인. 밤말고 낮에 만날 생각은 없어? 분명 우리 처음 대화했을 때는 낮이었던 것 같은데-” “하, 하지만 그때는……, 불가항력적이었고……, 잠깐이었으니까……. 낮이면 분명……, 이거, 눈에 띌 테고……. 그리고…….” 헨리의 질문에 에인은 더듬더듬 대답하며 물 밖으로 살짝 꼬리 지느러미를 꺼내보였다. 그리고 그 뒤엣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다. 워낙 수줍음을 타는 애니까, 자신 이외의 인간과 만나면 분명 숨어버릴 것이다. 물론 그전에 자신도 이 애를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지만 분명 이런 말을 하면 또 얼굴을 잔뜩 붉히며 숨어버릴 테니 안 하는 게 낫겠지. “뭐, 밤에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더 밝은 데서 우리 에인을 보고 싶달까- 에인은..
복도를 걷던 에인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딱히 별 게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 익숙한 복도의 풍경,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에인과 같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 딱히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그의 친구가 의아한 듯이 에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에인? 뭐 까먹은 거라든가?”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반쯤은 사실이었다. 분명 뭔가가 느껴져서 뒤를 돌아본 것은 맞지만,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분명 무언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류의 일에는 꽤나 무관심한 자신에게도 느껴졌을 정도였으니. 아니,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에인은 원래 가던 쪽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