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a Stella
금빛 정원의 얼음꽃 -2- 본문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째 하늘이 꾸물꾸물 흐려지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급한 대로 후드를 뒤집어 쓰기는 했으나 지금 내리고 있는 비는 아무리 봐도 잠시 내리다 그칠 요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비까지 내리다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라면 그냥 맞고 어떻게든 돌아가겠지만 쏟아지는 걸 보아하니 얼른 하룻밤 지새울 곳을 찾지 않으면 얼마 안 가 속까지 다 푹 젖을 게 뻔했다. 급한 대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간판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뭔가 보일 때까지 뛸까? 아냐, 그전에 다 젖을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 헨리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근처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그게 갑자기 비가 잔뜩 쏟아지는 바람에 오늘 하루만 신세질 수 없을까 해서……, 어라, 너는 아까 낮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내민 여자에게 헨리는 사정설명을 하다가 그가 누군지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헨리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여자는 이내 헨리를 알아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고민하며 아무 말도 않던 여자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는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정말? 고마워!”
“일단 몸 좀 녹이시고……, 금방 수건 갖다드릴 테니까요.”
여자가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헨리는 잠시 여자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 이름이 에인, 이었던가?
“어……, 그러니까……, 에인?”
“예? 제 이름은……, 어떻게…….”
“아, 맞구나. 아까 언니? 라고 해야 하나, 그 아가씨가 부르는 거 들었거든.”
“아……, 언니가…….”
헨리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순간 놀라 눈을 굴리던 에인은 사정을 듣자 다행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낮에 언니가 이 손님 앞에서 내 이름 불렀었지. 헨리의 겉옷을 난로 근처에 걸어둔 에인은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온 후 근처의 다른 의자에 앉아 헨리에게 말을 걸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시고…….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음, 뭐라 해야 될까……, 둘이 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집이 혼자 살기엔 넓은 편이라 당연히 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말야. 생긴 것도 닮아서 당연히 자매인 줄 알았고-”
“아, 그건 사정이 있어서……. 애초에 친자매도 아니고……, 정확히는 사촌 언니니까요……. 그 이상은 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에인은 ‘거기다 처음 뵈는 분한테 얘기하기도 그렇고-’라며 뒤에 살짝 덧붙였다. 굳이 저 말을 덧붙인 이유는 분명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왜 반말을 하는지에 대한 불만 표출이려나. 그치만 초면도 아닌데.
“그치만 우리 딱히 초면은 아닌걸? 어쨌든 더 묻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은 좀 괜찮아? 분명 낮에…….”
“그 일이라면 지금은 괜찮습니다. 처음 당하는 일도 아니고……,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일이니까…….”
헨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답한 에인은 말끝을 흐리며 손목을 문질렀다. 손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목에는 누군가의 손자국이 아직까지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에인은 시선을 피하듯 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자신쪽을 계속 바라보자 에인은 더듬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그……, 손목이라면 원래 흔적이 잘 남는 편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되고……. 아, 아까 말 끊은 건 죄, 죄송합니다만……, 그, 그렇게 유쾌한 얘기는 아니라서……. 사실 종종 일어나는 일이긴 한데……, 이유는 잘 모르겠고…….”
“음……, 그래?”
“어, 언니 마냥 예쁜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싹싹하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니까…….”
에인의 말에 헨리는 대답하는 대신 에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거겠지? 표정이나 행동을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충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딱히 좋은 이유도 아니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헨리의 시선을 느낀 에인은 이번엔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에인의 반응에 헨리는 더 이상 이 주제로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고 느꼈다. 확실히 유쾌한 얘기도 아니고.
“아, 에인은 딱히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여태까지 계속 나만 질문한 것 같은걸. 예를 들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되고?”
“그쪽이라면……, 사실 굳이 안 여쭤봐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서…….”
“그래? 대충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데?”
헨리의 말에 에인은 잠시 헨리쪽을 힐끔 쳐다봤다. 고민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에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음……, 먼 곳에서 오신 분 같다고나 할까요. 뭐, 짐작일 뿐이지만요.”
“와, 대단하네! 어떻게 알았어?”
“옷차림도 있고……, 딱히 이 근처에서 한 번도 뵌 기억도 없어서……. 오늘 하루는 즐거우셨습니까?”
“즐거운 것도 있고, 신기한 것도 있고? 뭐, 어딜 가든 사람 사는 데는 비슷비슷하지만- 그래도 내가 살던 데랑은 다른 점도 있으니까 신기하기도 했고? 즐거운 건……, 다들 활기차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보는 내가 다 즐거웠다고 해야 하나? 어쩐지 내가 살던 데보다 더 즐거워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기분 좋은 듯 얘기하는 헨리를 보고 에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겠지만.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어, 그, 그, 그게……, 드, 들으셨습니까……?”
“뒤는 잘 안 들렸지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했던가? 무슨 뜻이야?”
실수했다.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된 거 말해버릴까? 말해버려도 괜찮을까? 에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 모르겠다.
“……말 그대로입니다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요. 속사정은 전혀 아니겠지만.”
“그건 또 무슨 말?”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미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뻔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착취하는 귀족들과 착취 당하는 평민들. 그리고 무능하거나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황실. 뭐, 그쪽에선 저희가 어떻게 살든 알 바 아니겠지만요.”
“확실히 이미 아는 얘기긴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새롭네. 역시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네. 하나도 다른 점이 없어.”
“예, 확실히. ……시간이 늦었으니 이부자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 찻잔은 그냥 거기 놔두시면 제가 치울 테니까요. 실례하겠습니다.”
뒤돌아 선 에인은 조용히 가슴께를 문질렀다. 괜찮겠지, 이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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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분량조절 못하는 시나모리입니다 이거 왤케 길어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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