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a Stella
금빛 정원의 얼음꽃 -7- 본문
“그래서 당신, 누구예요?”
“내 이름은-”
그렇게 말하고 헨리는 주위를 몇 번 둘러보며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도 역시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그는 애슐리에게 몸을 가까이 하고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헨리, 헨리 노트야.”
“하?”
헨리의 이름을 들은 애슐리는 한참동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고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온 여러 말을 가까스로 억누른 애슐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저 그쪽 신고해도 돼요?”
“잠깐, 어째서?”
“아니, 사칭할 사람이 없어서 황제 폐하를……. 그 분 함부로 사칭하면 모가, 아니지. 목이 뎅겅하고 날아가거든요? 놀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아까 웬만큼 높으신 분 아니면 그렇게까지 안 놀랄 거라고 해서 그러는 거죠?”
애슐리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이자, 헨리는 재밌다는 듯이 몇 번 웃고서는 웃는 표정 그대로 주저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놀라는 걸 보고 싶었던 건 맞긴 한데, 거짓말은 아냐. 네 말마따나 사칭해서 좋을 것도 없고, 나도 내 목숨 귀한 건 알고 있어서 말이지.”
“……아니아니아니, 지금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잠깐만요.”
너무나도 당당한 헨리의 모습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한 듯 애슐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한참동안 아무런 미동이 없다가 고개를 들고서는 헨리를 바라봤다. 그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듯 헨리를 이리저리 쳐다보던 애슐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닮은 것도 같긴 한데.”
“닮은 게 아니라 본인이라니까?”
“……그럼 머리는요? 원래 길지 않아요?”
“아, 그건 붙임머리. 격식 차리는 데에서는 예의상 하고 있는 건데 이렇게 나올 때는 불편해서 안 해.”
“그럼 진짜 황제 폐하예요?”
“그렇다니까? 정 못 믿겠음 한 번 신고해보는 게 어때?”
‘내가 사칭죄로 잡혀가거나, 아님 네가 불경죄로 잡혀가거나. 둘 중 하나잖아, 안 그래?’ 라고 말하고 씩 웃는 헨리를 보며 애슐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저도 제법 제 목숨이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솔직히 거짓말도 아닌 것 같고……. 아, 그리고…….”
“그리고?”
답지 않게 쭈뼛거리면서 헨리의 시선을 피하던 애슐리는 그럼에도 계속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에이,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헨리의 말에 애슐리는 굽혔던 허리를 피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되게, 알면 알수록 이미지랑은 많이 다르네요.”
“응? 그건 무슨 뜻?”
“음, 시찰 자주 다니시는 것 같으니까 폐하에 대한 소문이 대충 어떤지는 아실 테고……. 그냥, 소문과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 그렇다면 영광이고. 그래도 나 헛살지는 않았나봐. 에인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해주네.”
“잠깐, 걔도 이거 알아요!? 언제부터!?”
“엑,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자신의 말에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목소리를 높인 애슐리의 반응에 헨리는 놀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헨리가 진정시킬 새도 없이 ‘언제부터 알았는데요!?’ 라고 물어오는 애슐리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헨리는 애슐리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꽤 됐을 텐데. 에인 집에서 자고 갔을 때 가르쳐줬으니까.”
“……말도 안 돼. 걔가 알고서도 그런다고? 사실 안 믿는 거 아냐? 아닌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때 안 그랬을 텐데. 그럼 믿는 건 맞는 것 같고. 아니, 그러니까 알고서도 저런다고……?”
헨리의 답에 애슐리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헨리가 그를 불러도 안 들리는 듯 계속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던 애슐리는 한참 후에야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고 헨리를 바라봤다.
“이제 진정했어?”
“……아직 완전히 진정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요. 지금도 좀 안 믿기네요.”
“그래서 왜 그러는지 좀 알려줄 수 있어?”
“……제 질문에 답해주시는 거 보고요.”
“무슨 질문인데?”
헨리의 말에 애슐리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었던 목적은 그것이 맞았다. 다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신도 충격을 꽤 받은 탓에 질문할 타이밍이 좀 늦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은 애슐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인을 어떻게 생각해요? 좋아해요?”
* * *
‘저 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내 얘기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안 들려서 정확히 뭐가 뭔지는 모르겠네. 결국 엿듣는 걸 포기하고 부엌 문에 대고 있던 귀를 뗀 에인은 괜히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럴 깜냥도 없을 뿐더러 지금까지 엿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리가 신경쓰여서 하던 준비까지 도중에 관두고 한참을 둘의 대화를 엿듣던 에인은 변변한 수확을 얻지 못하고 다시 손님 받을 준비를 시작했다.
* * *
“으, 음……,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그야 궁금하니까요. 아, 에인한텐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에 좋아한다고 써있어서긴 하지만. 이 질문의 진의는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사실 확인에 더 가까웠다. 딱히 한가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보다 까마득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굳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걸 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웬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일의 당사자가 그만큼 눈치가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애슐리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듯한 헨리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치만 에인이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이게 전부.”
“그래요? 의외네요, 원하는 건 전부 맘대로 할 수 있으실 텐데.”
“아하하, 그럼 의미가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헨리의 대답에 애슐리는 당장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싫다는 애 억지로 데려갈 것 같지 않으니까 다행이려나.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던 애슐리는 무언가에 생각이 닿은 듯 다시 헨리에게 물었다.
“그거, 거짓말은 아니죠?”
“에이,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어? 애초에 거짓말할 거면 신분도 제대로 안 밝혔을 테고.”
‘거기다 거짓말해봤자 왠지 다 들킬 것 같은데 그럴 바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라고 덧붙이는 헨리를 보며 애슐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던 애슐리는 괜히 창밖을 보고선 화제를 바꿨다.
“근데 해도 져가는데 안 돌아가셔도 되는 거예요? 슬슬 사람들 몰려올 때도 됐고.”
“엑, 벌써? 그럼 이만 가볼게. 식사 잘했어.”
급하게 돌아가는 헨리에게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해준 애슐리는 마침 준비를 다 마쳤는지 부엌에서 나오는 에인을 보고 그의 등을 몇 번 툭툭 치고선 작게 중얼거렸다.
“힘내라, 응원할게.”
“뭐야, 갑자기…….”
“그러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에인을 보고 씩 웃은 애슐리는 다시 이것저것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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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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