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a Stella
금빛 정원의 얼음꽃 -8- 본문
“너, 나랑 얘기 좀 해.”
“갑자기 무슨 얘기야? 아니, 그전에 손목 좀…….”
에인의 말에 비로소 자신도 모르게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애슐리는 손에 주고 있던 힘을 푸는 대신 에인을 빤히 쳐다보며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언제부터 알았어?”
“……거의 바로.”
“그럼 이제 좀 괜찮은 거야? 아님?”
지금의 애슐리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몇 번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에인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애슐리는 태도를 바꿔 이번엔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초에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기에 에인은 그 다음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은 아직 좀, 그런데.”
“그럼 그 사람만 괜찮은 거야?”
“아마. 아예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조금이라도 나아지긴 했으니까.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뭘 그렇게까지 해. ……하더라도 나중에 내가 할 테니까.”
“그래, 그래-”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을 돌리는 에인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애슐리는 퍼뜩 원래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 지금 이거 물어보려고 말 건 게 아니지. 다시 일을 하려던 에인을 붙잡은 애슐리는 원래 하려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알잖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언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날 테니까 안심해. 나도 내 주제는 알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으, 모르겠다. 가서 일해, 일.”
“뭐야, 궁금하게시리…….”
걱정하는 일 충분히 일어나고도 남아서 문제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걱정은 아니긴 한데. 이걸 정말 말할 수도 없고……! 당장이라도 입을 열면 튀어나갈 것 같은 말을 겨우 억누른 애슐리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머리 헝클어지면 나중에 나만 고생인데. 아, 몰라, 몰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인은 그런 애슐리를 어쩐지 한심한 눈으로만 볼 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 * *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애슐리는 가게 중앙의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종종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농땡이를 피우고 싶을 때가 있었다. 거기다 뭔가 맛있는 거라도 사서─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수다라도 떨면 정말 최고일 텐데. 누구 얘기할 사람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에인이 자리를 비운 것은 자신 탓이었기 때문에 뭐라 불평할 것도 없었다. 아, 이대로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애슐리의 마지막 말에 맞장구라도 치는 건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어서 오세요! 아직 저녁 준비가 안 돼서 조금 기다리셔야 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물론. 그래서 이 시간대에 오는 거긴 하지만?”
“아, 깜짝이야. 한동안 안 오셔서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잖아요.”
“미안, 미안. 그동안 좀 바빴거든. 혼자?”
“네, 에인은 배달. 기억하고 있으실진 모르겠지만 여기, 은근 높으신 분들도 자주 이용하거든요. 주로 아랫사람을 보내거나 아님 저희쪽 여유가 되면 이렇게 배달 보내거나.”
폐하, 처럼 이렇게 오시는 분은 드물지만요, 특히 이렇게나 자주는! 목소리를 확 낮춰 마지막 말을 덧붙인 애슐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에 같이 웃어준 헨리는 애슐리의 맞은편에 걸터앉아 말했다.
“간만에 온 거니까 기다렸다가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안 그러면 아쉽잖아, 그치?”
“그렇죠? 걔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 매정해라. 본인 아니면 모르는 거 아냐?”
“뭐, 기다리는 동안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상대는 되어드릴게요.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토라진 듯한 헨리에게 애슐리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고 싶은 말 있다며?’라며 헨리가 묻자, 애슐리는 간단하게 먹을 것을 가져온다고 말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금방 애플 파이와 홍차를 가져와 헨리 앞에 놓아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거까지는 안 줘도 되는데.”
“아까 심술부린 것도 있고, 할 말이 있는 것도 저니까요. 그리고 원래 누군가 먹여주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일 하고 있는 거고.”
“그래? 그렇다면 잘 먹을게. 사실 그동안 좀 그리웠었거든. 황궁 음식도 맛있지만, 난 역시 이쪽이 마음에 든달까.”
“그거 영광이네요. 칭찬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헨리의 칭찬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애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싹 바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본인 허락 없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역시 알리는 게 낫다는 마음이 더 컸다. 어차피 이는 그가 알아야 할 것이었고, 알기 싫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걔는 절대 이런 얘기 안 할 것 같단 말이지? 말하기 싫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쪽한테 있어서는 차라리 미리 아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그러니까 이건 용서해줘야 돼? 가장 중요한 얘기는 안 할 테니까. 마음의 정리를 마친 애슐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한참 지난 일이라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저번에 제가 그쪽 정체 알고 엄청 놀랐던 이유, 알려드리려고요.”
“어째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놀란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의 반응이 제법 강렬했는지 헨리는 애슐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대답했다. 헨리의 말에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에인은 폐하 같은 사람 싫어하거든요. 정확히는 무서워한다고 해야 하나, 좀 복잡하긴 한데.”
“음……, 대충 무슨 말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땐 좀 싫은 소리도 듣긴 했는데.”
“뭐야, 그래서 그때…….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럼 더 얘기하기 쉽겠네요. 걘 높은 사람, 특히 남자를 싫어해요. 딱 폐하 같은 사람이죠, 그쵸? 사정이 좀 있긴 한데, 이건 제가 얘기할 건 아니고.”
헨리의 말에 애슐리는 그동안 이해할 수 없던 무언가를 드디어 이해한 듯 놀라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지금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고 자각하며 머리를 휘휘 저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헨리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면 얘기가 빨랐다. 애슐리는 죄책감이 한층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했다.
“그치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잖아요? 그렇게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꼭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고. 오늘 배달 보낸 이유도 그런 맥락이긴 한데……. 아무래도 아직도 그닥 나아지진 않은 것 같고…….”
그런데 걔가 폐하는 그다지 그렇게 느끼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에요……. 말끝을 흐린 애슐리는 골치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예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는 거라면, 그냥 일찌감찌 관둬요. 적어도 난 끝까지 걔 편이고 싶어요. 가뜩이나 상처도 많은 아이인데. 마지막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애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말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역시 너무 많이 말해버렸나. 헨리를 힐끗 쳐다본 애슐리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표정에 더 이상 쳐다보는 것을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겠어. 지금 바로 확답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가볍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냐. 이것만은 알아줘.”
어째 오늘은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네. 얼굴 못 보고 가는 건 좀 아쉽지만. 말을 마친 헨리는 어쩐지 씁쓸해보이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붙잡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한 애슐리 역시 예의상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배웅했다.
자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버린 파이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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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데다 다리 역할을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쭉 쓰려고 했는데...어쩐지 시리어스해져버렸습니다ㅇ<-<
다리 역할 아냐...진지한 편이야...다음 편이 다리 역할을...할 거예요...다음 편도 쭉 쓸 예정입니다 나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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