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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a Stella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인은 들어오라고 말하며 읽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얼마 안 가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한동안 맴돌던 무거운 침묵을 깨며 에인은 먼저 말을 꺼냈다.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제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편하게 얘기하도록 할까요.” “왕비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듣자하니 최근에 폐하께 저를 폐비할 것을 요청하는 서명을 올리셨더군요.” 말을 마친 에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작게 ‘폐비, 폐비라…….’ 라 중얼거렸다. 에인의 말에 상대는 흔들림 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답했다. “폐비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
“야.” “무슨 일인가요, 상훈?” “너 말이야, 그 귀신 쫓아다니는 것 좀 정도껏 해. 오죽하면 니 수호령이 내 꿈에 나오겠냐!?” “네!? 제 수호령이 상훈 꿈에 나왔다구요!? 어째서!? 왜!? 왜 제 꿈이 아니라 상훈 꿈에 나오는 건데요!? 아니, 이게 아니지……! 어떻게 생겼어요!? 대화는 나눴나요!? 말해주세요!!!” “너 내 얘기 듣고 있긴 하냐!?” 오늘 꿈 얘기를 하면 얘가 좀 진정을 할까, 하고 꺼냈던 말인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저거,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대체 며칠이나 걸리려나…….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건데. 상훈은 대답을 재촉하는 아카리를 피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야, 내가 말할 틈은 줘야 대답을 하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아, 맞다.” 계속되는 질문에 상훈이 짜증이 난..
“오늘 헤어지면 이제 또 한동안 못 만나는 건가?” “……예. 그럴 겁니다.” “뭐, 어쩔 수 없나. 얼른 에인이 졸업했음 좋겠네-” “그, 그건 저도…….”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에인을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거의 항상, 늘 있는 일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나는 텀이 길어졌기 때문에 그 손길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작별의 시간이었다. “아, 이젠 정말 헤어질 시간이네……. 나 이만 갈 테니까 오늘 잘 자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아프지 말고, 알겠지?” “……예, 반드시 그럴 테니까……. 그, 그럼 선배님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푸흐흐, 알겠어. 그럼 좋은 밤, 에인.” ..
※BGM 有 잘 지내고 계십니까, 선배님? 저는……, 이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선배님이 정말 많이 보고 싶다는 걸 뺀다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주위의 모든 것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선배님을 닮아 있어서, 그래서 어느 걸 보더라도 선배님이 생각나 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선배님이 더 보고 싶어져서, 그래서……. ……선배님이 지금 제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절실히 느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항상 서로가 함께일 수는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겪게 되니 그 허전함은 상상 이상보다 더 커서……, 차라리 시간을 돌려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마저 해버리고 맙니다. 그럴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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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에인. 밤말고 낮에 만날 생각은 없어? 분명 우리 처음 대화했을 때는 낮이었던 것 같은데-” “하, 하지만 그때는……, 불가항력적이었고……, 잠깐이었으니까……. 낮이면 분명……, 이거, 눈에 띌 테고……. 그리고…….” 헨리의 질문에 에인은 더듬더듬 대답하며 물 밖으로 살짝 꼬리 지느러미를 꺼내보였다. 그리고 그 뒤엣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다. 워낙 수줍음을 타는 애니까, 자신 이외의 인간과 만나면 분명 숨어버릴 것이다. 물론 그전에 자신도 이 애를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지만 분명 이런 말을 하면 또 얼굴을 잔뜩 붉히며 숨어버릴 테니 안 하는 게 낫겠지. “뭐, 밤에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더 밝은 데서 우리 에인을 보고 싶달까- 에인은..
복도를 걷던 에인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딱히 별 게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 익숙한 복도의 풍경,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에인과 같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역시 딱히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그의 친구가 의아한 듯이 에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에인? 뭐 까먹은 거라든가?”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반쯤은 사실이었다. 분명 뭔가가 느껴져서 뒤를 돌아본 것은 맞지만,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분명 무언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류의 일에는 꽤나 무관심한 자신에게도 느껴졌을 정도였으니. 아니,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에인은 원래 가던 쪽으로 ..
"그러니까, 제가 죽으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요?" 헨리의 손에 들린 총을 보고 에인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갑자기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도, 그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도 믿기는 힘들었지만,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을까. "쏘십시오. 방아쇠만 당기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에인……." "선배님을 더 못 보는 건 슬프지만……, 선배님께 소중한 건 저 하나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 이러면 빗나가지도 않겠죠. 아니, 즉사일 겁니다." 헨리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에인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댔다. 죽는 거 자체는 무섭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세계에 비하면 자신의 목숨쯤은 한없이 가벼운 거 아닌가. 그리고 ..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한다. 좀 더 오래, 좀 더 많이, 좀 더 가까이, 그렇게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만 언제나 생각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아니, 말조차도 꺼내지 못한다. 어째서? 이렇게나 원하는데, 이렇게나 바라고 있는데, 어째서?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변해버렸는데,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선배님은 모르고 계시니까.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선배님이 싫어하시기라도 하시면……? 그게 너무 싫어서, 그게 너무 두려워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하지만 아무리 억눌러봐도, 아무리 싫다고 해봐도 한 번 시작된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
달조차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깊은 밤이었다. 잠자리에 누운 지도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을 터였지만 에인은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탓일까? 아니, 잠귀가 아무리 밝다 해도 그 정도 소리로 잠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중요한 건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옆에서 같이 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기억조차도 제대로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거의 혼자서 잤고, 설령 부모님이라 해도 같이 잔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데, 그 누군가가 자신이 지금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에인이 잠에 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