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차/단편 (45)
Lucida Stella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밤의 적막을 가르고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초인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세요?’라고 묻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미도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 저, 고등학생인데……, 홧김에 가출해버렸는데……. 괜찮으시면 하루만 신세질 수 있을까 해서…….” 말을 마친 미도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으나 과연 어느 속 좋은 누가 문을 열어줄까 싶었다. 분명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겠지. 근데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데……. 아……, 우울해……. 죽고 싶다……. 그런 미도리의 마음을 알아준 건지는 몰라도 얼마 안 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놀란 미도리가 문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 순간, 막 ..
“자, 다녀오렴.” “Oui, monsieur.” 쌍둥이 인형이 떠난 관(館)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고요함이 건물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 공간에서 이베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픽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애초에 이 아침과 밤의 틈새라는 찰나의 공간에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연속된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정체된 시간과 그 모순된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모순된 존재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이와 자아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 그 모순됨에 걸맞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하늘의 움직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일그러진 황폐한 풍경들뿐이었다. 물론 그것에 딱히 불만은 가..
“───그러니 공주님, 부디 제게 공주님께 입을 맞출 수 있는 영광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머, 그건 오히려 제게 영광……, 서, 선배, 죄, 죄송해요……! 그, 다, 다시 한 번만……!” 가까이 다가오는 호쿠토의 얼굴을 보고 질끈 감아버린 눈을 다시 뜨며 토모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무리 연기인 데다가 실제로 입을 맞추지는 않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키스씬 같은 건 굳이 왜 넣는 거냐고, 망할 변태가면……!!! 토모야는 속으로 지금 자리에 없는 히비키 와타루에게 괜히 성질을 부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사는 다 외웠고, 리드는 선배가 해주실 테니까 보조만 잘 맞추면…….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토모야는 호쿠토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아, 아니, 이게..
밤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끌벅적하던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어둠을 밝히고 있던 불빛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저 고요함이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시끄러웠던 탓일까, 지금의 고요함은 평소의 고요함보다 몇 배는 더 깊은 것 같았다. 모두가 고요함으로 사라진 가운데, 할로윈 나이트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어느덧 새벽놀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셰이머스.” 누군가의 묘비의 앞에 도착한 할로윈 나이트는 묘비에 적힌 이름을 나지막히 불렀다. 예전의 자신의 이름이지만, 이제는 아닌 이름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는 묘비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죽은..
“……유우 군은 나한테, 한 번도 좋아한다고 해준 적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이즈미는 마코토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말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탓에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유우 군이 좋았다. 그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넘쳐서,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유우 군이 좋았다. 그만큼 세나 이즈미는 유우키 마코토가 좋았다. “이즈미 씨…….” 마코토는 이즈미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봐봐, 역시 이번에도 말해주지 않을 거잖아. 딱히 보답을 바라고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좋아..
“여기가 너희 집이야?” “응! 역시 아틀란티스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려나~” ‘사실 나도 너무 오랜만이라 좀 어색하지만!’ 이라 말하며 지수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 어색하다고는 했지만, 역시 자신의 방이 맞긴 한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편안한 느낌. 그와 다르게 라무는 주위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었다. “지수, 이건 뭐야?” “어? 웬 종이……,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내려놔!!!” “그래? 무슨 숫자가 가득해서 혹시나 하고…….” “아냐아냐. 진짜 별 거 아니니까!” 아, 대체 저건 어디서 찾아냈지. 역시 요정이라 그런가!? 분명 잘 숨겨놨었는데. 아직도 의문이 남았는지 계속 성적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무의 손에서 성적표를 뺏은 지수는 조..
“미카쨩~! 내가 좋은 가게 발견했……, 어라?” 산뜻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던 아라시는 찾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디저트 가게 발견한 김에 같이 가려고 데리러 왔는데, 대체 어디 간 거지? 평소에 늘 이 시간쯤에 끝내서 일부러 데리러 왔는데……. “저기, 미카쨩 혹시 어디 갔는지 아니?” “미카요? 글쎄요…….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가긴 했는데……, 오면서 마주치지는 않았어요?” “아니……, 못 봤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짐작이 가는 데가 몇 군데 있긴 있었다. 그렇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걸. 다 찾아보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고. 그냥 다음으로 미룰까? 하지만 왠지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뭐, 어쨌든 알려줘서 고..
“……그래서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하여튼, 세상엔 정말 별 사람이 다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한창 또 불만을 털어놓은 마틴은 이미 반쯤 녹은 파르페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이렇게 그동안 쌓인 일을 토로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나, 오늘은 쌓인 게 상당히 많은 듯했다. 자신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마틴의 파르페는 거의 사라지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지금 파르페를 입에 넣은 것도 녹는 걸 봤기 때문이지, 딱히 파르페를 먹고 싶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원래 단 게 기분 풀어주는 데는 정말 최곤데- 지금은 그것도 딱히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블론디가 기분을 풀까……. 자신도 마틴처럼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라는 생각..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아니, 애초에 인형이니까 잠이란 것을 잘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 시간대가 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 따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읏차.” 주위를 몇 번 둘러보던 엘리제는 우물 밖으로 살짝 빠져나왔다. 어차피 애초에 이 숲은 낮에도 어두컴컴해서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인 데다가, 설마 미쳤다고 이 밤에 이 숲을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인형인 자신이 혼자 돌아다닌다 해서 의심을 받을 일 따위, 생기지 않을 것이다. * * * “이렇게 올려다 보는 밤하늘은 새롭네-” 동그랗지 않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건 얼마만이었더라? 최근에 우물 밖을 나오기는 커녕, 밤하늘을 올려다 본 지도 꽤 오래됐다는 것을 엘리..
────그날은, 지독하게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더위에 짓눌릴 것만 같은, 정말 사람이 미쳐버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더운 날. 분명 나는, 그 더위에 취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깜빡 잠들어 버린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꿈을 꿨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분명 더위에 취한 게 틀림없다. 타들어가는 하늘 아래로 또 다시 너가 떨어지고, 내 손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더듬는다. 떨어진 너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절규한다. 그 절규가 멈추기도 전에, 너는 다시 내 눈 앞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또 다시 내 손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더듬고……. 차라리 너 대신 내가 떨어진다면 영원히 반복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그렇지만 나는 그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런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