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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a Stella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 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까. 하여튼 잊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와, 내가 알게 된 그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그렇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목적은……. * * * “휴도르의 신전?” “응, 가본 적 있냐구.” “음, 글쎄…….” 레온티시아는 오리온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가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말이야.” “어?” 갑작스러운 말에 오리온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레온티시아는 그의 반응이 재밌는지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아닌, 독사과 같이 요염하고도 사악한 미소를.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잖아?”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오리온은 입술을 꼭 깨물..
“죽이라고, 범하라고, 이드는 노─래─해─♬” “……심심해. 메르는 혼자 어디 가버리고…….” 무슨 일일까, 메르헨 없이 혼자 우물에 남은 엘리제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 둘이 함께였기 때문에 엘리제는 이것이 매우 익숙하지 않았다. 엘리제가 멍하니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엘리제~” “뭐해~?” “엣……?” “우리야, 우리.” “들어가도 되지?”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그림자의 주인─정확히는 주인들─은 우물에 뛰어들었다. 이미 이런 비슷한 일은 많이 해본 듯 그 둘은 안정적인 자세로 바닥에 착지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치, 오르텐스?” “응! 오랜만이야! 그치, 비올레트?” “어……, 오랜만이긴 하네……. 그래서, 무슨 일?” “같이 놀려고..
그와 이별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슬퍼하면 그가 떠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바람처럼 자유로웠고,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고작 찰나의 반짝임에 불과한 내가 잡아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좋아했어도, 아무리 사랑했어도, 그가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 옆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그의 발길이 닿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이별을 택했다. 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 * *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정말.”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 “그래도, 걱정되는걸.” “걱정 하지 말고. 그리고 언제라도 나는, 아니, 저는 여기서 당신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끝내 걱정스러운 표..
※TS 주의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고쳐 잡으며 리즈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얼추 다 처리했으나, 가장 강해보이는 것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였으니까. “저기, 너 말이야. 내가 지금 많이 지쳤거든?” ‘그러니까 얼른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리즈는 살짝 조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어도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마물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도리어 리즈를 공격했다. “큭……!”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피한다고 피한 건데, 아까의 싸움으로 좀 지친 탓일까. 리즈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제법 세게 맞은 탓인지 피가 진득하니 손에 묻어나왔다..
“에바리스트! 이것 봐. 조각을 이렇게나 많이 모았어!” 품에 초록빛과 파란빛이 도는 조각을 잔뜩 안은 채 인형은 들뜬 듯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세계에서의 생활한 시간 덕에 에바리스트는 그 조각들이 자신을 비롯한 전사들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때마다 으레 기억을 찾아줄 전사들에게 ‘조각을 이렇게나 많이 모았어!’라며 자랑하면서 웃는 인형의 버릇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번에 기억을 찾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음……, 이번이 몇 번째 기억이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세 번째 기억이다, 지시자.” “어머, 벌써? 기뻐라♬ 아, 그럼 아이자크 좀 불러줄래, 에바리스트?” “물론, 기꺼이.” 기억을 찾는 과정에는 이유를 알 수 없..
한 차례 거센 비가 내렸다. 소나기였던 듯 비는 금방 그쳤지만, 흠뻑 젖은 몸을 다 말리기도 전에 야속하게도 해는 지평선 뒤로 숨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의 추위가 두 사람에게 찾아왔다. 평소에는 반가워했을 서늘한 바람에도, 오늘만큼은 반갑지 않았다. “아, 춥다…….” “조금만 기다려. 불 피울 만한 데 찾아볼 테니까.” 잠시 내리긴 했지만 강한 비였던 탓에 웬만한 데는 거의 다 푹 젖어있었지만, 라무는 용케 비에 거의 젖지 않은 곳을 찾아 불을 피웠다. 불은 기세 좋게 타올랐지만, 아무래도 비의 탓인지 젖지 않은 나무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기에 떨고 있는 두 사람의 몸을 데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 불 피웠는데도 춥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조금만 참..
날 미워해줘.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나는 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어.” “유감스럽지만, 전 이미 모든 것을 잃어서 이해를 못하겠군요.” “이해해달라고 한 적 없어.”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오직 이것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잃어버리면? ────애초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미련을 낳고, 망설임을 낳고, 주저를 낳는다. 나는 정말 이걸 바라왔던 것인가……? 사실은 그 감정마저도 변질된 무언가가 아닐까─? 늘 그랬듯이 날 미워해줘. 늘 그랬듯이 날 경멸해줘. 늘 그랬듯이 날 증오해줘. 내가 그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우리의 관계에서 쌍방향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
달마저도 졸린 듯 구름 뒤에 살짝 숨은 늦은 밤이었다. 수명이 거의 다 된 듯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 아지트에 도착한 세토는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조심하며 문을 살짝 열었다. “다녀왔슴……, 어라?” 언제나 듣는 사람 없는 일방적인 인사말이었다. 늘 그가 아지트에 돌아오는 시각은 모두가 잠에 들 시각이기 때문에 깨어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아지트에 불이 켜져 있는 일 또한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환하게 켜져 있는 불,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누군가. 낯선 풍경이었다. “아, 세토 왔어?” “마리……? 지금 늦었는데 뭐하는 검니까……?” “으응,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래서 그 참에 세토 기다렸어!” 마리는 놀란 듯한 세토의 얼굴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세토는..
※TS 주의 아이자크와 나는 소꿉친구다.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둘의 부모님은 친한 이웃사촌이었고, 우리 둘도 자연히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늘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런데……. 내 눈이 어딘가 이상해졌는지, 아니면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요즘 들어 이 자식이 멋져 보이기 시작한 거다. 거기다 키도 훌쩍 커져서 뭔가 어른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아, 분명 어렸을 때는 내가 더 컸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눈높이가 비슷해지더니, 지금은 나보다 한 10cm는 큰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얼굴도, 어렸을 때는 좀 여리여리했던 것 같은데. 이젠 선도 좀 굵어지고. 뭐랄까, 이제 완전 어른스러웠..
“……” “카노, 또 멍 때리고 있어?” “아, 아냐, 아냐. 내가 무슨 멍을 때렸다고.” “흐음, 수상한데.” “뭐, 안 믿을 거면 말고.” “너, 요즘 계속 멍만 때리고, 말도 잘 안 하고. 이상해.” “그런가……?” “마치 속이 텅텅 비고 있는 것 같은……. 무슨 뜻인지 알아?” “아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키도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런가, 요즘 그랬던가……? 잘 모르겠다. 텅텅 비고 있다고?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계속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는 날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음……, 어라? 내 손이 이렇게 차가웠던가……?” 생각하던 와중, 무심결에 맞잡은 손이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냥 추운 데에 있어서 차가워진. 그런 느낌이 아닌..